약진하는 사과
김산
사과는 간결합니다. 악수를 하지 않아도 사과는 투명하
고, 세상의 모든 사과를 파는 상점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
운 손을 내밉니다. 무당의 사주를 점치는 사과. 사과를 드
로잉하는 사과. 신들의 방언을 방언하는 사과. 사과 상점
의 권리금이 일제히 치솟습니다. 어제는 이별을 고하는 사
과를 판 상점 주인이 과일 상가에서 퇴출되었습니다. 파란
사과 빨간 사과 멍든 사과 여문 사과들이 비닐봉지에 담겨
저녁의 골목으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사과를 기다리고 사
과의 취향을 존중합니다. 사과를 깎던 두툼한 손 아래로
두꺼운 사과의 껍질이 떨어집니다. 사과의 달콤한 향이 밤
의 미로 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릅니다. 정중한 사과 한 알
을 들고 악력을 다해 반을 쪼갭니다. 사과 속에는 팔랑팔
랑 나비의 화석이 잠을 자고, 사과의 씨앗은 폭염의 대지
위에서 꿈틀꿈틀 기지개를 켭니다. 사과는 무럭무럭 자라
나고, 사과는 주렁주렁 매달립니다. 나비 한 마리가 가을
로 겨울로 최선을 다해 약진합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말이 어긋나고 서로 충돌하면서 마음의 색채는 멍든 사과처럼 농도가 짙어진다. 찢어지고 산산조각 난 관계를 앞에 두고 망연자실한 모습을 떠올려 보자. 폭발할 것만 같은 분노와 수치스럽고 비참한 감정들이 뒤섞이면서 마음은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점점 무게를 더한다. 마음의 무게가 늘어날수록 또 말은 더 짓눌린다./ 사과는 언제 껍질이 툭 떨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움 속에서 진행된다. 중간에 껍질이 끊어지지는 않을까. 과육이 많이 딸려 벗겨지지는 않을까. 껍질을 벗기는 마음은 이처럼 조심스럽다. 이처럼 서서히 껍질이 벗겨지는 과정 속에서 달콤한 향이 조금씩 피어오른다. 사과는 원래 그런 것. 꺼내기 힘들지만 일단 바깥으로 나오면 그야말로 간결하고 투명하기 이를 데 없는 것.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말이 그렇듯이, 사과의 말은 대개 마음의 복잡한 움직임을 전부 담지 못한다. '미안해'와 같은 말은 너무 단출하여 속살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도대체 아무런 맛과 향을 느낄 수가 없다./ 충분하지 못한 사과들. 우리는 상점에 흔하게 널린 사과를 구입하듯이 "부끄러운 손"을 금방 내민다. 더불어 사과의 위력을 무당의 사주를 점치거나 신의 말도 넘어설 수 있을 것처럼 과대평가한다. 그렇지만 사과 상점의 권리금이 치솟을수록 사과의 품질과 맛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불쑥 사과를 내미는 경우나 사과를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경우 모두 사과의 맛을 느끼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복잡한 마음처럼 다양한 사과들은 취향에 따라 각각의 손에 들려 골목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그것의 맛을 상상하면서 천천히 그리고 정중하게 껍질을 벗긴다. 마침내 속살이 드러나고 급기야 쪼개져서 그것의 내부가 훤히 노출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과의 충만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품고 있는 씨앗이 새로운 열매를 맺는 잠재적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단순하고 간결한 두 음절의 말일 뿐인 "사과"는 이런 식으로 무르익는다. "최선을 다해 약진"하면서 불분명하고 불만족스러운 감정을 어루만진다. "사과"라는 말이 과육의 향기와 복잡하고도 오묘한 맛을 획득하는 과정에는 이처럼 기다림의 시간을 따라 흐르는 리듬이 필요하다. 단순한 사과만으로 덮을 수 없는 미궁의 생은 말이 순환하면서 스스로의 몸과 접촉하는 궤적 속에서 풍요로워진다. 자신의 감정에만 치우쳐서 말을 가로막고 자르며 그것의 진행 방향을 임의적으로 내모는 것으로는 미세한 맛과 향에 결코 접근하기 어렵다. 조금씩 약진하는 리듬 속에서 짓눌린 말은 "꿈틀꿈틀 기지개"를 켜고, 붉게 달아오른 마음은 부드럽고 흰 속살을 드러낸다. 사과는 이런 식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주렁주렁 매달"린다. (장은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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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치명』에서/ 2017. 5.15. <(주)함께하는그룹파란> 펴냄
* 김산/ 1976년 충남 논산 출생, 2007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키키』, 프로젝트 포크 밴드 '김산 밴드'에서 보컬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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