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동거
이화은
해마다 봄이면 창문에 꽃그림을 그려주던 헌칠한 장년의 벚나무가 문득
쓰러졌다 어느 아침, 큰 바람도 없었는데
집안 사정도 다르지 않다 행운목이 시들시들 말라가는가하면 찬장 속의
접시가 쩡 혼자서 금이 갔다 그가 한 짓일 것이다
그는 푸르거나 완벽한 걸 거부한다 특히 희망적인 걸 못견뎌한다 행운
목의 불행은 아마 그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접시는 접시 주제에 너무 완
벽하게 둥글었다 싱싱한 뉴스가 그의 손에 닿기만 해도 바로 헌 신문지처
럼 구겨지니
사람들이 그를 허무나 우울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나는 그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이름값을 하기 위해 정말 공공연한 우울이나 허무가 될까봐
그를 뒤에서 조종하는 자가 시간이라는 설도 있지만 문자판이 누렇게 뜬
우리 집 게으른 벽시계는 그럴만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
딱 나만큼 늙은 그는 늙을수록 점점 교활하고 대담해져 느닷없이 내 목
을 조르거나 가슴을 누르기도 한다 버둥거리며 진땀을 흘리는 내게 다량의
수면제를 권하거나 슬쩍 면도칼을 쥐어주기도 하는데
아슬아슬 그와 나의 동거는 지극히 위험하다 그러나 한동안 그가 기척
하지 않으면 안절부절 줄커피를 마시며 그를 기다린다 밤늦게 거들먹거리
며 주인처럼 그가 돌아올 때까지
-전문-
▶ 신의 언어가 침묵한 자리, '그'의 '위험'(발췌)_ 장무령
'그'는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하고, 기다리게 하는 '나'의 절대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기척하지 않음'. '돌아오지 않음'으로 '나'를 주관한다. 결국 '나'는 '그 없음'으로, 즉 "그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로서 '그'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없음'이 '그'이다. 이때 주목되는 것은 '그', 즉 '없음'을 통해 시인의 언어가 '나'의 모든 방향을 향해 열린다는 것이다. '나'가 위반되고 되접히고 이중화되며 두터워지고 무한해진다. 결국 '나'는 정리, 정의, 구분을 넘어 선다. 오로지 "훤칠한 장년의 벚나무가 문득 쓰러졌다 어느 아침, 큰 바람도 없었는데" 라는 덩어리만이 끊임없이 '그', '없음', '나의 내면'에서 울림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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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2017-여름호 <신작 소시집> 에서
* 이화은/ 1991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미간』등
* 장무령/ 1999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선사시대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다』, 연구서『한국 현대시의 경물과 객관성의 미학』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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