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순식간에, 아주 천천히/ 김상미

검지 정숙자 2017. 5. 17. 12:49

 

 

    순식간에, 아주 천천히

 

    김상미

 

 

  변한다 모든 건 변한다

  우디 앨런의 영화도 변하고 팀 버튼의 영화도 변하고

  건장한 팔다리처럼 강직했던 내 의지도 변한다

  아무리 연장자들이 삶은 변하지 않는다 소리쳐도

  젊은이들은 언제나 불 주위로 몰려들고 활활 타는 불구덩

이로 뛰어든다

  원상 복구라는 말은 이제 낡은 말이 되었다

  그래도 늑대들과 노는 것, 아무리 외로워도 늑대들과 노

는 것만은

  아직도 꺼림칙하고 고통스러울 뿐

  우연히 마주친 대선배의 냉랭하고 못마땅한 표정 안에 숨

겨진 검은 의도쯤이야

  꽃이 제일 슬플 때는 피지 못할 때라며

  부드러운 가을바람처럼 무심으로 꽉 품어주면 그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얼굴이 변하듯 인격도

변한다

  개념 없는 시가 개념 있는 시보다 더 잘 먹히고

  짧은 시가 긴 시보다 더 소통이 잘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

네들의 자유

  오답 속에 무참히 익사하는 게 어디 시뿐이던가

  양치기 소년은 어느 시대 어디에나 있고 더 알팍한 자들은 

  미리 봐둔 서정적 비상구를 통과해 제집에서 편안히 히트

작들을 써대고 있잖은가

  지겹도록 순수를 양심을 본분을 지켜도

  내 인생의 안뜰에 쌓이는 건 타인의 쓰레기들

  다른 누군가를 알게 되는 것보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는 것보다

  나 자신을 바로 아는 게 훨씬 험난한 세상이다

  어딜 가도 포식자들은 에너지 넘치는 순한 이들의 문고리

를 끊임없이 탐하고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흘러도 모딜리아니 그림 속 여자

들은

  눈동자 없는 슬픈 눈으로 우리를 빤히 쳐다볼 것이다

  그러니 누가 내 팔목을 쓰윽 그어주렴

  아직도 내 피가 붉은지 보고 싶다

  그 붉은 피로 어제는 짧은 시를 쓰고

  오늘은 긴 시를 쓰고

  내일은 또 어떤 시를 쓸지 알 수 없지만

  누가 뭐래도 내 소원은

  '이 얼마나 멋진 날인가'로 시작하는 시를 써보는 것

  그리고 그 시를 들여다보기 위해 온몸을 숙이고

  그 속으로 황홀하게 빨려들어가는 것

  순식간에,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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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에서/ 2017. 4. 28. <(주)문학동네> 펴냄

  * 김상미/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검은, 소나기떼』『잡히지 않는 나비』등, 2003년 박인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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