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석화
김상미
어느 날 나는 '공부' 앞에 붙은 '열심히'란 부사를 떼어
내고
학교 외의 삶을 가진 아이들에게로 갔다.
그들은 '공부' 대신 '세상의 얼룩'을 갖고 놀았다
그들의 가방 속에는 책 대신 어른들에게서 밀수입해온
'생각'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학점 대신 세상의 변화에 매달리는 것이
었다.
나는 내 눈에 비친 그들의 이미지가 너무 좋아
날마다 거울 앞에 서서 그들을 흉내내었다
거울에 비친 나는 마치 미친 오토바이를 몰고
금방 어디론가로 떠나갈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았으며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습관처럼 남몰래 도서관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그들의 '얼룩'이 내 몸에도 묻어나길 기다렸다.
손수 죄짓지 않고도 스스로 받는 벌!
그 지독한 유희에서 깨어나기가 싫었다.
나는 시민 K가 아니라
시인 K
악착같이 '세상의 얼룩'을 빨아먹고 뱉어내고 또 빨아먹는
시인 K
눈물나게 외로운 전광석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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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에서/ 2017. 4. 28. <(주)문학동네> 펴냄
* 김상미/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잡히지 않는 나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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