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김행숙

검지 정숙자 2017. 5. 12. 17:44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김행숙

 

 

  하염없이 승강장 벤치에 앉아 있다. 스크린도어에 비친 내 얼굴이 터

널 속에서 어른거렸다. 떠나지 못하고 같은 곳을 맴도는 지하철의 유령

들과 섞여 있었다.

 

  밖에서 당신을 봤어. 어젯밤 남편이 말했다. 제발 아무데서나 불행한

여자처럼 넋 놓고 앉아 있지 마. 그는 수치심을 느낀 것처럼 보였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승강장 안으로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니 승

객 여러분께서는 노란 안전선 밖으로 한걸음…… 

 

  한걸음 물러섰으면 좋겠다. 내가 당신을 조금 더 모르고, 당신이 나를

조금 더 모르면, 우리는 어쩌면 조금 더 좋은 사이일지도……

 

  정전이 돼도 지하철은 환하다. 한낮의 수면내시경 검사처럼 열차가

유령들을 관통했을까. 안개가 걷히는 하늘처럼 유령들이 열차를 통과했

을까. 스크린도어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스크린도어가 열린다.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본다.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앞면과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뒷면과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앞면.

 

  그리고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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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2017-4월호 <신작특집> 에서

  * 김행숙/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