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네스트 헤밍웨이에게
노향림
대학 캠퍼스 생활 내내 나의 우상이자 이상이었지요.
공부보다는 왠지 사색과 음악을 즐기며 앞으로 나 자신의 나아갈 길이나 고민하던 때 나는 당신을 생각했었지요. 소설가라 하기 보다는 당신은 나에겐 시인이었어요. 나의 아이디얼리스트, 즉 이상주의자라 불러버렸지요. 소설 속 문장 어느 구석을 봐도 제 눈에는 장편의 대 서사시를 쓰는 것 같기에 그렇습니다. 투우와 사냥 낚시를 즐겨했고 종군작가 열정의 작가로 불리는 당신. 실제로 모험을 하듯 세계 제2차 대전 종군기자로 참전해 부상당한 절절한 체험을 소재로 한 편 한 편 작품으로 완성되어 나올 적마다 나는 섭렵하다시피 당신 소설을 읽었어요.
다시 읽고 또 읽어도 지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다소 허무주의에 가까운 허탈감과 무력감으로 지친 주인공들을 냉혹한 눈으로 그려내기도 하고 짧은 대화체의 문장들은 절제된 명쾌함이나 그 비유가 나에겐 다 시로 비쳐질 정도였어요. 그리고 네 번의 결혼 생활 중, 말년을 미국이 아닌 쿠바 해변에서 보내는 당신이 낚시나 즐기고 행복할 줄 알았었지요. 그러나 당신의 난데없는 사망 소식은 나를 한동안 멍하게 만들었지요. 사실이 아니길 바랐으나 사실이었어요. 외신을 타고 흘러들어온 당신의 엽총자살 소식은 제발 오보이고 허구이길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새벽을 맞기도 했답니다. 나보다 더 당신을 아끼고 좋아했던 세계의 독자들을 그런 식으로 저버리고 배반했다니… 그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 드라마틱한 당신의 삶이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도 그렇게 극적이었어요.
당신의 불멸의 명작들은 당신의 독자들에게 지금도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독자들도 당신의 자살 소식은 왠지 당신이 쓴 소설 속 비극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들렸고 아직도 나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의 언론에는 당신의 죽음이 의문사로 남아 있다고 제기할 정도였어요. 그만큼 당신의 독자들은 상실감이 컸었지요. 당신의 소설은 뛰어납니다. 그리하여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실감이 오고는 합니다.
당신의 소설 속 숱한 사랑과 역경을 겪는 주인공 중에서도 아직도 떠오르는 건 '무기여 잘 있거라'입니다. 전쟁 참화 속에서도 생생히 사랑을 꽃피우는 두 주역의 주인공 배우들은 실제 당신이 직접 채택했다지요. 소설 제1장 서두에서 주인공이 혼자 내뱉는 말 중에서도 '비가 오네요' '눈이 오네요' 하면 어김없이 그 소설 주인공들은 비극을 암시합니다. 드문 일이긴 하나 극적으로 살아남는 희망의 메시지가 된다는 것도 알아차렸습니다. 그 소설을 읽은 뒤라 난 대한극장에서 개봉되었을 때 첫날 달려가 표를 구해서 영화를 봤었지요. 이들 사랑의 비극적 결말을 소설 첫 대화에서 암시하듯 그렇게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비가 오네요'하고 시작됩니다. 남녀 주인공인 헨리 중위와 캐서린은 비를 피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지요. 비록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다 해도 영화를 보는 내내 헨리 중위 역을 맡았던 미남 배우 록 허드슨에게 빠져버렸어요. 그 당시 그는 얼마나 미남 배우였습니까? 군복을 입어도 훤칠한 키에 잘 어울렸어요. 세계 수많은 여성 팬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던 그. 그도 말년의 비극을 실제 안고 세상을 뜬 걸로 기억합니다. 죽음도 제일 몹쓸 병인 에이즈라는 병에 걸려 쓸쓸히 임종을 맞았다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그가 온 걸로 기억됩니다. 공항에 내려서 첫발 내딛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이 처참했습니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몸에 병이 있어 그러려니 했답니다. 그때까지 그 무서운 현대의 흑사병이나 다름없는 에이즈인 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었지요. 깡마른 나무처럼 비쩍 마르고 갑자기 늙어버린 모습. 비록 TV로 본 모습이지만 쇄골로 남은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왜 손 흔드는지 보기에 민망할 뿐이었어요. 언론에서도 그의 병을 구태여 에이즈라고 밝히진 않았습니다. 막연히 동성애자라는 건 알았지만 그 뒤 그의 고향 근처 병원에서 투병하다 숨진 다음에야 그가 에이즈로 사망했다고 보도했지요.
모든 죽음은 비극이라 하지만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여주인공 캐서린이 끝내 죽음을 맞자 그 앞에서는 울지 않고 편안히 죽음을 보내고 돌아서 걷는 헨리 중위의 의연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 장면이 함께 떠올랐을까요. 희미한 상처 자국처럼 그 장면이 오버랩 되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헤밍웨이 당신의 소설 원작을 충분히 그가 살려낸 남자 주인공이어서 그랬을까요. 시 한 편을 쓸 때도 혼신을 다 하는데 당신은 소설 속 주인공들을 만들고 혼을 부여해 긴 서사시로 완성해내는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그 추억 속 주인공도 내 속에 오래도록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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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인』 2017-봄호 <기획특집|명작의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 에서
* 노향림/ 1970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바다가 처음 번역된 문장』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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