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엄마는 구미호/ 김정현

검지 정숙자 2017. 3. 16. 21:17

 

 

    엄마는 구미호

 

     김정현

 

 

  한겨울에도 마트에 가면 빨간 딸기를 볼 수 있다. 사시사철 먹고 싶은 과일을 돈만 있으면 사 먹는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다. 어릴 적 우리 집에서는 경안천 건너 산비탈에 작은 딸기밭이 있었다. 장날이면 엄마는 새벽같이 일어나 딸기밭으로 나간다.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가득 고이게 하는 빨갛고 예쁘고 맛있는 딸기를 바구니에 곱게 담아 경안시장으로 이고 간다. 어느 장날 새벽,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비벼 뜨고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딸기밭에 가기 위해서다. 엄마를 돕는다는 핑계로 새벽잠을 물리친 것이다. 꼬맹이가 도우면 얼마나 돕겠는가 오히려 그 먼 길을 가려면 오히려 짐이 되었을 터이다. 엄마는 그런 내 속내를 훤히 알면서도 데리고 나섰다.

 

  밭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크고 실한 딸기를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엄마는 내 속을 들어갔다 나온 듯 "먹고 싶지 양껏 따먹어라. 배불리 먹고 바구니에 예쁘게 따 담아라." 그러셨지만 나는 팔아야 할 딸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딸기를 선뜻 따먹지 못하는 내게 엄마는 큼직한 딸기를 따서 내 입에 넣어 주셨다.

  그랬다. 엄마 마음은 매일 자잘한 것만 우리에게 먹였는데 한 번쯤은 실한 딸기도 마음껏 먹이고 싶어 짐이 될 일임에도 데리고 간 것이다.

  딸기를 따서 입이 메도록  먹었다. 배가 불룩해져서야 바구니에 딸기를 따 담을 수 있었다. 그즈음이다. 아래쪽에서 속닥거리는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는 나를 향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납작 엎드리라고 손짓을 했다. 얼마 전부터 딸기밭을 자꾸 뭉개놔서 그렇지 않아도 속을 끓이며 벼르던 참이었다. 그것을 아는 나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납작 엎드렸다. 워낙 어릴 때여서 그 낮은 딸기 밭고랑에도 몸이 숨겨졌다. 잠시 후 엄마의 고함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딸기 서리 들어왔다가 엄마한테 들킨 키가 장대같이 큰 고등학생 오빠들이 널따란 도랑을 뛰어넘어 도망을 쳤다. 그들을 잡으려고 따라가는 엄마, 내 어린 눈에 엄마는 어른이라고 해도 그 오빠들보다 키가 작아 그 도랑을 뛰어넘어 가서 잡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내 예상은 빗나갔다. 엄마가 그 넓은 도랑을 날듯이 뛰어넘어 덩치가 산만 한 오빠를 잡아 무릎을 꿇렸다.

  어느 부모든 그렇겠지만,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로 농사를 잘 지어서 새끼들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농촌의 어려운 살림인지라 좋은 것은 시장에 내다 팔고 상품가치 없는 것만 어린 새끼들에게 먹이는 것이 못내 안타깝기만 했다.

  우리 집은 그렇게 어려운 농촌 살림을 꾸렸다. 딸기만 곱게 따먹고 갔다면 별 탈이 없었을 것이다. 서리를 하러 와서 밭을 못 쓰게 뭉개놓고 가니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있던 터라 몸에 있는 힘을 모두 그 오빠들을 잡아 야단을 하는 데 쏟으신 모양이다.

  이후  난 덩치 큰 그 오빠들보다 엄마가 너무나 무서웠다. 동화책에 나오는, 치마 속에 꼬리를 감추고  다니는 여우가 우리 엄마가 아닌가 행각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부엌에서 일하면 치맛단 속에서 여우꼬리가 살짝 삐져나오지 않을까 해서 수시로 살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도록 엄마의 치맛자락에서 여우의 꼬리를 본 적이 없다. 꼬리를 잘 감추어 그런 것일까?

  잘 살든 못 살든 작은 일 하나에도 늘 자식 걱정과 자식을 향해 퍼붓는 따뜻한 엄마의 사랑의 모습만 보았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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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온문학』 2017-봄호 <수필> 에서

  * 김정현/ 시집『복사골 춘향이』외, 산문집 『수수한 흔적』, 동시집 『눈 크게 뜨고 내 말 들어볼래』, 그림동화『키가 쑥쑥 마음도 쑥쑥』/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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