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니체 전 상서/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7. 3. 19. 14:19

 

 

    니체 전 상서

 

    정숙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 글을 읽을 때 저는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십삼 년을 더 걸어왔군요. 이렇게나 빨리, 이렇게나 무참히 세월이 흘러갔군요. 이 책의 말미에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1984.9.18.13時 00.’이라고요. 그 무렵엔 책을 너무 우러른 나머지 볼펜이나 잉크를 사용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조심조심 연필로 사인했기에 삼십여 년이 흐른 지금, 흑연이 날아가버려 가까스로 보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저도 이젠 왈패가 다 되었어요. 빨간 볼펜으로 과감히 밑줄도 치고 날짜도 적어 넣습니다. 왜 하필 볼펜이냐? 빨강색이냐고요? 볼펜은 색깔이 날아가지 않기 때문이며, 빨간 색은 자칫 글자를 스치더라도 자획을 훼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수 좁은 집으로만 숱하게 이사를 다니면서도 책만큼은 버리지도, 푸대접하지도 않고 모셔왔기에 저는 지금 그 오랜 시간을 펼치고 더듬으며 한 해의 끝자락인 겨울밤을 다독이고 있습니다. 나이를 많이 먹으면 책도 이렇듯 체중이 가벼워져야만 하는 걸까요? 그 옛날의 중량이 아닌, 너무나도 가벼운 이 무게 때문에 저는 충격과 만감(萬感)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그뿐일까요? 퍼석하고 힘없는, 누렇게 변색된 페이지들이 제 마음 깊은 곳을 마구 휘젓고 있습니다. 삼십 년 전에 읽고 덮은 뒤 다시 열어보지 않고 세워둔 사이 이렇게 혼자 늙은 것입니다.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도 제 곁에서, 없는 듯, 조용히, 그러나 가장 믿을만한 영혼의 벗으로서 하 세월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어느 고전에나 나올 법한 한 장면입니다. 책을 좋아하던 한 아이가 어느덧 그 마음 그대로 노파가 되어 이런 글을 쓰고, 회상하는 이 정경이 어찌 현실이겠습니까. 제가 젊은 나이에 이와 같은 소설을 읽었다면 먼 세계의, 자신과는 무관한 타인의 이야기로만 여기고 ‘어쩌면!’ 하면서 감동했을 것입니다. 그 늙음조차도 청춘 이상의 값을 매기고 동경하며 그 문학 속 인간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가요? 그런 맥락으로 한 올 한 올 짚어가자니 그 시절의 꿈이 현실이 된 게 아니라, 현실이 그 옛적의 꿈속으로 들어온 것이로군요. 그렇지만 그 꿈을 싣고 흐르는 강은 부드럽고 빛나는 궤도가 아니었습니다. 홍수로 인한 범람과 가뭄, 온갖 고독감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휘청거립니다. 휘청거렸습니다. 휘청거릴 것입니다. 세월 또한 그렇게 흘러갔고, 흘러가고, 끊임없이 우리를 적시며 조롱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그 희미한 연필자국을 따라가다가 “인간은 초월해야 할 그 무엇이다.”라는 구절을 만났습니다. 거기 줄이 그어져 있는 걸 보면 저는 그때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세파에 시달리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초월해야 할’ 그 지경에까지 몰고 가는 것일까요? 무엇이 모자라 우리는 그 지경에까지 끌려가 처박히는 것일까요? “아아! 익사할 수 있는 바다나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당신은 탄식합니다. “진실로, 죽기 전에 우리는 너무도 지쳐버렸다. 이제 우리는 눈뜬 채로- 무덤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새로 한 시 이십오 분입니다. 제 고향에서는 ‘새벽 한 시’라고 아니하고 으레 ‘새로 한 시’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러면 그게 곧 새벽 한 시라는 걸 누구라도 잘 알아들었지요. 그런데 며칠 전, 한 문우에게 그런 개념으로 저의 취침 시간을 얘기했더니 영 못 알아듣더라고요. 여기서 이 시시콜콜한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니체 선생님께서도 다음부터는 수월히 이해하시기를 바라는 뜻에서입니다. ‘새벽 한 시’보다야 ‘새로 한 시’가 더 시적이지 않나요? 어쨌든 ‘초월’이라는 지점은 여타의 모든 고독과 함께 피 흘린 위도가 아니겠어요? 저는 그 검붉은 성찰에 의지하고 적응하며 휘청댔습니다. 인생의 가운뎃부분인 삼십여 년을 “위대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위대한 경멸로 사랑”해왔습니다.

  당신은 “아무도 다시는 사랑할 수 없는 곳, 그곳을 우리는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고 언명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폐부에 새기고 진정 “아무도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어 봤습니다. 그러나 수포로 돌아가기만을 반복했지요. 짜라투스트라, 제가 어찌 그분의 깨달음을 단번에, 아니 몇 번의 경험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겠습니까. 정신 못 차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짜라투스트라, 그분은 바로 비극의 천재 당신인 것을, 언감생심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을 떠올리면 수직적 난황도 조금씩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 어둡고 긴 관문들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철학과 지혜의 문고리를 찾아가는 길이며 자아의 편달이라는 진리를 간혹 감각하곤 했습니다.

  우리를 휘청거리게 하는 대상은 바람도 호랑이도 아닌 우리들 자신입니다. “산다는 것- 그것은 불에 태워도 더워지지 않는 것이다.” 삼십여 년 전, 맨 눈으로 읽었던 이 책을 안경을 끼고도 모자라 자루 달린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세로로 배열된 글씨인 데다가 활자도 요즘 책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지! 그런데도 그때는 불편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당신은 다시 한 번 선언합니다.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무엇이다.” 2016년 12월 31일 15시 51분에 쓰기 시작한 이 원고 위로 2017년 1월 l일 새로 세 시 삼십일 분이 지나가고 있군요. 그새 해가 바뀐 것입니다. 노트와 책도 저와 함께 또 한 살 쌓았습니다. 당신과 함께 한 송구영신의 낮밤, 찬란했습니다. ▩  

 

 

  * 참고:『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外)』세계문학전집 32

    역자: 강두진/ 발행처: 을유문화사/ 초판발행: 1965.11.5.

    신장판 초판발행: 1979.9.10./ 신장판 재판발행: 1980.10.15.

    정가: 3,700원(1980년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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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학인』 2017-봄호 <기획특집명작의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 에서

   * 정숙자/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뿌리 깊은 달』, 산문집 『행복음자리표』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