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류수연_'함께' 내딛는 찬찬한 걸음(발췌)/ 곡시(哭詩) : 문정희

검지 정숙자 2017. 3. 14. 21:06

 

 

    곡시(哭詩)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문정희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이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한 타국에서

  그녀는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조롱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근대 문학의 선봉으로

  새 문예지의 출자자로 기생집을 드나들며

  술과 오입의 물주였던 스타 김동인은

  그녀를 모델로 '문장' 지에

  소설 '김연실전'을 연재했다.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성폭력,

  비열한 제2의 확인사살이었다.

  이성의 눈을 감은 채, 사내라는 우월감으로

  근대 식민지 문단의 남류(男流)들은 죄의식 없이

  한 여성을 능멸하고 따돌렸다.

  창조, 개벽, 매일신보, 문장, 별건곤, 삼천리, 신여성,

  신태양, 폐허, 조광**의 필진으로

  잔인한 펜을 휘둘러 지면을 채웠다.

  염상섭도, 나카니시 이노스케라는 일본 작가도 합세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그들은 책마다 교과서마다

  선구와 개척의 자리를 선점했다.

  인간의 시선은커녕 편협의 눈 하나 교정하지 못한 채

  평론가 팔봉 김기진이 되었고

  교과서 편수관, 목사, 소설가 늘봄 전영택이 되었고

  어린이 인권을 앞세운 색동회의 소파 방정환이 되었다.

  김동인은 가장 큰 활자로 문학사 한가운데 앉았다.

  처음 그녀를 불러내어 데이트 강간을 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은

  애국지사의 딸과 결혼하여 친일의 흔적까지 무마하고

  대한민국 국방 경비대 창설로, 초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훈장과 함께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탄실 김명순은 피투성이 알몸으로 사라졌다.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으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는

  일본 뒷골목에서 매를 맞으며 땅콩과 치약을 팔아 연명하다

  해방된 조국을 멀리 두고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소설 25편, 시 111편, 수필 20편, 희곡 · 평론 등 170여 편에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를 처음 이 땅에 번역 소개한

  그녀는 처참히 발가벗겨진 몸으로 매장되었다.

  꿈 많고 재능 많은 그녀의 육체는 성폭행으로

  그녀의 작품은 편견과 모욕의 스캔들로 유폐되었다.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칠십여 년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

  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전문, 『문예중앙』, 2016. 겨울호

 

 

   '함께' 내딛는 찬찬한 걸음(발췌) _ 류수연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라고 부제로 단 문정희의 「곡시」는 한 인간의 생이 얼마나 손쉽게 파괴될 수 있는 것인지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한다. 김명순*은 1910년대의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조선 최초의 여성 작가였다. 그러나 그녀는 일생 동안 자신을 둘러싼 온갖 추문에 시달려야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녀가 누군가의 뮤즈가 아닌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서고자 했기 때문이다./ 시인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보여주듯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김동인, 염상섭, 김기진, 전영택, 방정환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우리 근대문학사를 대표하는 문인들이 한 여성에게 가했던 사회적 폭력을 참담하게 나열한다. 일본 유학 시절에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사건을 겪고 억울한 퇴학까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명순은 자기 앞에 놓인 편견과 차별의 거대한 벽 앞에서 항복하지 않았다. "탈식민적 여성 해방과 여성 주체의 자기결정권"**을 지켜내며 자기 글쓰기를 끝까지 견지함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증명하고자 했던 의지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잔인한 펜 끝은 성폭력 가해자인 이응준이 아닌 피해자 김명순을 향했다. 그녀를 향한 악의적인 루머의 진상을 들추어내며 시인은 여성을 향한 차별과 혐오가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인지 새삼 확인한다./ 그러나 시인을 울게 하는 것은 비단 김명순의 삶만은 아니다. 오늘, 이곳에서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곡'을 멈출 수 없게 한다.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이어진 이래, 연일 성폭력 생존자들의 고발이 이어졌다. 그 한 명 한 명 속에서 시인은 또 다른 김명순을 발견했으리라. 여성의 정신과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을 예술로, 피해자를 뮤즈로 포장하면서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이 거대한 폭력의 사슬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던 우리 문학의 민낯은 너무나도 추악했다. 한 여성의 삶을 파괴하고 그녀를 매장하고도 100여 년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스스로 복제되고 확대되어온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이 여전히 시인의 앞에 펼쳐져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 "김명순(金明淳,1896~1951)은 나혜석 · 김원주와 함께 자유연애론을 주창한 1세대 신여성이며, 1917년 『청춘』의 현상공모에 처녀작 「의심疑心의 소녀少女」가 뽑히면서 정식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한 조선 최초의 여성작가이기도 하다. 김탄실, 망양초, 망양생 등의 필명을 쓰기도 했던 그는, 여성 해방을 전제로 한 연애담론의 핵심적인 주창자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여류명사였다."(류수연, 「김명순의 초기 소설과 엘렌 케이의 연애론」, 「동아시아 한국문학을 찾아서」, 소명출판, 2015, 414쪽) 

  ** 같은 글, 같은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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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2017-2월호 <현대시 월평>에서

  * 류수연/ 문학평론가, 2013년 『창작과비평』신인평론상으로 등단, 현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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