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박혜진_핀포인트를 찾아서(발췌)/ 곡시(哭詩) : 문정희

검지 정숙자 2017. 3. 12. 00:01

 

 

    곡시(哭詩)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문정희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이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한 타국에서

  그녀는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조롱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근대 문학의 선봉으로

  새 문예지의 출자자로 기생집을 드나들며

  술과 오입의 물주였던 스타 김동인은

  그녀를 모델로 '문장' 지에

  소설 '김연실전'을 연재했다.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성폭력,

  비열한 제2의 확인사살이었다.

  이성의 눈을 감은 채, 사내라는 우월감으로

  근대 식민지 문단의 남류(男流)들은 죄의식 없이

  한 여성을 능멸하고 따돌렸다.

  창조, 개벽, 매일신보, 문장, 별건곤, 삼천리, 신여성,

  신태양, 폐허, 조광**의 필진으로

  잔인한 펜을 휘둘러 지면을 채웠다.

  염상섭도, 나카니시 이노스케라는 일본 작가도 합세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그들은 책마다 교과서마다

  선구와 개척의 자리를 선점했다.

  인간의 시선은커녕 편협의 눈 하나 교정하지 못한 채

  평론가 팔봉 김기진이 되었고

  교과서 편수관, 목사, 소설가 늘봄 전영택이 되었고

  어린이 인권을 앞세운 색동회의 소파 방정환이 되었다.

  김동인은 가장 큰 활자로 문학사 한가운데 앉았다.

  처음 그녀를 불러내어 데이트 강간을 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은

  애국지사의 딸과 결혼하여 친일의 흔적까지 무마하고

  대한민국 국방 경비대 창설로, 초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훈장과 함께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탄실 김명순은 피투성이 알몸으로 사라졌다.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으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는

  일본 뒷골목에서 매를 맞으며 땅콩과 치약을 팔아 연명하다

  해방된 조국을 멀리 두고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소설 25편, 시 111편, 수필 20편, 희곡 · 평론 등 170여 편에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를 처음 이 땅에 번역 소개한

  그녀는 처참히 발가벗겨진 몸으로 매장되었다.

  꿈 많고 재능 많은 그녀의 육체는 성폭행으로

  그녀의 작품은 편견과 모욕의 스캔들로 유폐되었다.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칠십여 년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

  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전문-

 

  * 김명순(1896~1951): 호 탄실. 1917년 춘원 이광수에 의해 등단한 소설가. 많은 작품을 썼지만 일본 유학 중 열아홉 살에 고향 선배로부터 데이트 강간을 당한 후 조롱과 따돌림을 당하고, 역시 고향 선배인 김동인의 소설「김연실전」의 실제 인물로 알려져 문단에서 유폐된 한국 여성 최초의 작가.

  ** 김명순을 소재로 냉소와 멸시의 글이 실린 잡지들

 

  -『문예중앙』, 2016. 겨울호     

 

 

  ▶ 핀포인트를 찾아서(발췌) _ 박혜진

  탄실 김명순의 잃어버린 명예에 대해 생각해본다. 성폭행, 데이트 폭력, 낙인, 냉소와 조롱, 문학적 형식으로 감행된 확인사살.  능멸과 따돌림……. "문인은 날개 달린 물고기다. 물 위로 조금이라도 올라오면 새들에게 잡아먹히고 물속으로 들어가면 바로 물고기들에게 잡아먹힌다." 문인에 대한 볼테르의 정의가 문인 일반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에서는 새들에게 잡아먹히고 밑에서는 물고기들에게 잡아먹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영원히 소외되었던 탄실이야말로 날개 달린 물고기, 외로운 존재였다. 김명순의 명예를 훼손한 메커니즘도 여성혐오였음은 물론이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이 몰두하고 추구했던 '문학'의 형식으로, 타락한 남성 문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작가를 꿈꿨던 한 여성이 문학의 이름으로 송두리째 자신을 부정당한 지옥을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문정희는 "비명과 피눈물이 멈추지 않는" "여자라는 식민지"라고 표현했다. 아직 독립은 오지 않아서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  // 2016년 시작된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운동은 한국 근대 여성 문학사를 출발부터 망가뜨린 여성협오의 역사가 악질적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폭로했다. 문정희의「곡시」는 그 멸렬한 고토의 반복에 격렬하게 분노한다. 분노의 힘으로 위선과 폭력 위에 지어진 공허한 명성의 집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한 사람 한 사람 정확하게, 오차 없이 정밀하게, 말하자면 핀포인트를 찾아 저격하는 방식으로, 여성을 성적 도구로 인식하고 그 인생을 마음껏 착취하려 든 남성들에 대한 문정희의 공격은 물론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이었을 뿐"이다.  

   

    --------------------

  *『현대시2017-2월호 <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에서

  * 박혜진/ 문학평론가, 2015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평론 부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