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
장정심(1898~1947, 49세)
쇠라도 동녹이 덮였을 것이오
돌이라도 깎였을 것이었지마는
정역이 합한 순결한 피라
아직도 돌다리우에 뚜렸이 보이오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기세찬 장마물 긴 세월간에도
흙이 덮이고 패이고 흘러갔으련만
아직도 저 흙 우에 뚜렸이 보이오
굉장하게 높이 쌓은 대리석 다리야
한시간에도 수만사람이 왕래하것만
선죽교 외롭고 적막한 충신의 다리야
행객이 있거니 없거니 늘 붉어있고
그리하야 고려의 자손들이란
피 식을 날이 별로 없이
죄 없이 고결한 저 붉은 피가
이 땅의 자손들을 길러주었소
-전문-
▶ 장정심의 시에 나타난 기독교적 세계관(발췌)_맹문재
"선죽교"는 앞에서 살펴본 금강산과는 다른 특성이 있는 장소이다. 금강산이 풍광이 아름다운 명산이라면, "선죽교"는 비극적인 장소인 것이다. 따라서 "선죽교"는 일견 낙원의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시인은 충신의 정신이 배어 있는 숭고한 장소로 노래하고 있다. 민족인들이 품고 지향해야 할 역사적인 터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 "선죽교"는 경기도 개성에 있는 돌다리로 고려 말기 정몽주가 죽음을 당한 곳이다. 고려 말기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위하고 조선을 건국하기 위해 세력을 모으고 있었는데, 고려의 충신으로 일컬어진 정몽주에게도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하여가」로 그 뜻을 전하자 정몽주는 충신답게 「단심가」로 거절했다. 그 후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일파에게 철퇴를 맞았다. / 화자는 정몽주의 그 충성심이 "쇠라도 동녹이 덮였을 것이"고 "돌이라도 깎였을" 정도로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지워지지 않았다고 노래한다.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기세찬 장마물 긴 세월간에도/ 흙이 덮이고 패이고 흘러갔으련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역이 합한 순결한 피라/ 아직도 돌다리우에 뚜렸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외롭고 적막한 충신의 다리"를 붉은 마음으로 바라본다. 정몽주의 충성심이 여전히 살아 있기에 "고려의 자손들이란/ 피 식을 날이 별로 없"다고 믿는 것이다. 또한 "죄 없이 고결한 저 붉은 피가/ 이 땅의 자손들을 길러"줄 것을 기대한다. 정몽주의 충성심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여는 초석으로 삼는 것이다. / 장정심의 이와 같은 미래 인식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연상시킨다. 『성경』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구절이 있다. 개인적인 의로움과 사회적 정의를 간절하게 소망하면 메시아가 와서 그와 같은 세상을 세워주리라는 것이다. 또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태복음」5장 6~10절)라는 구절도 있다. 의로운 일에 힘쓰면 천국 같은 낙원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 위의 작품에서 장정심은 마치 『성경』에서 제시된 그 의(義)가 수행된 장소로 삼고 있다. 비록 정몽주가 비극적으로 죽임을 당한 곳이지만, 오히려 그의 충성심이 빛나는 장소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정심은 선죽교를 민족인들이 품어야 할 역사적 성지(聖地)로 제시하고 있다. 비록 육체적 희생이 따른 곳이지만 올바른 정신 가치가 구현된 곳으로 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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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문학 연구총서 47『여성성의 시론』에서/ 2017.1. 25 발행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론집『한국 민중시 문학사』『여성시의 대문자』등 다수, 편저 『박인환 전집』『김명순 전집-시, 희곡』외, 공편『김후란 시 전집』등, 시집『먼 길을 움직인다』『기룬 어린 양들』등. 현직 안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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