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나희덕_미학적 진원지로서의 기형도(발췌)/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검지 정숙자 2017. 4. 19. 01:31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1960-1989, 29세)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 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

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 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전문-

 

 

  ▶ 미학적 진원지로서의 기형도(발췌) _ 나희덕

  기형도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길 위에 있다. 이 시의 '나'도 모든 길들이 흘러오는 저녁의 정거장에 서 있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는지 알지 못한 채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다고 여기며 나그네는 이렇게 말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라고. '나'는 짐짓 희망을 향해 몸을 돌린 것 같지만, 실은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을 처연하게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다가오는 어둠에 천천히 버무려지는 이 풍경에는 절망과 희망, 추억과 망각, 자연과 인간, 개인과 집단, 내면과 현실 등이 서로 교차하며 뒤섞인다. 그 대립되는 양 축 사이에서 예민하게 작동하는 윤리적 감수성은 '미안하지만'이라는 말의 반어적 뉘앙스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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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2017-봄호 <issue>에서  

  * 나희덕/ 1989년 《중앙일보》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뿌리에게『그녀에게』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