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故鄕)
정지용(1902-1950, 48세)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네 고향 진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전문-
▶ 이미지 혹은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발췌) _ 조강석
이 시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의 고향이 있다는 것이다.(정지용의 「고향」에 대한 이런 관점의 설명은「정지용 초기 시에 나타난 근대의 '감성적' 전유 양상 고찰」,『상허학보』, 2010.6에서 개진된 바 있다.) 그의 절창으로 손꼽히는 「향수」에서 정지용의 고향은 구체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향수」에서 형상화하려고 했던 고향은 이미 과거에 현전했던 모습 그대로의 고향이라기보다는 늘 근저에서 체험의 변별성을 생산하는 '순수 과거'에 속하는 고향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향수」와「고향」의 사이가 보인다.「고향」의 1연을 보라. 그는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실 그에겐 세 개의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던 고향, 과거의 고향, 그리고 현재의 고향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던 고향, 즉「향수」에서 여러 이미지로 표상된 바 있는, 순수 과거에 속하는 고향은 현재의 고향은 물론이고 과거의 고향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이중의 환원 불가능성을 지닌 고향이다. 그것은 고향을 떠나 근대 문물을 체험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기호들을 변별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근거로서의 어떤 것 즉, 순수 과거로서의 고향일 따름이다. 순수 과거로서의 귀향은 불가능하다. 이 시가 절창인 까닭은 세 개의 고향을 적시하고 불가능한 귀환을 근대인의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근원적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뢰즈 식으로 얘기하자면 그 향수는 단지 과거를 지향하는 의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순수-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거듭거듭 되비추는 데에서 발생한다.
--------------
*『계간 파란』2016-가을호 <issue 들뢰즈>에서
* 조강석/ 2005년 《동아일보》를 통해 문학평론 등단, 저서 『이미지 모티폴로지』『비화해적 가상의 두 양태』등
'작고 시인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맹문재_한용운 시에 나타난 '님'의 이성성(발췌)/ 인과율 : 한용운 (0) | 2017.02.18 |
---|---|
맹문재_김명순 시의 주제(발췌)/ 저주 : 김명순 (0) | 2017.02.17 |
김춘식_시인이 마지막으로 본 것(발췌)/ 홍여새 열 마리 외 1편 : 송수권 (0) | 2017.02.05 |
김점용_풍경과 상처/ 山 : 김소월 (0) | 2017.01.14 |
이숭원_사물의 속성과 상상력의 작용(발췌)/ 산도화(山挑花) 1 : 박목월 (0) | 2017.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