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김춘식_시인이 마지막으로 본 것(발췌)/ 홍여새 열 마리 외 1편 : 송수권

검지 정숙자 2017. 2. 5. 18:58

 

   『문학사상』2017-2월호, 한국 정통의 서정시인 故 송수권의 미발표 유고시 10편 중 2편

 

 

    홍여새 열 마리

 

     송수권(宋秀權, 1940~2016, 76세)

 

 

  추석 무렵 아버님 산소에 벌초를 하려고

  시골집에 내려 갔었다

  삼십 년째 비워둔

  빈집 장독대 흙마당 가에

  올해도 빨간 봉선화가 다발로 피어 있었다

  고모가 시집가기 전까지 나는 고모 등에서

  흙마당 한번 밟지 않고 자랐다고 한다

  이맘때면 봉선화 꽃잎을 따서

  백분가루에 짓찧어 열 손가락 끝에

  비단 헝겊의 골무를 만들어 씌워주곤 했다

  한밤중 어둠 속에서 몰래 그 골무를 벗어보면

  열 마리의 홍여새가

  새벽 하늘 어디론가 떠서 날고 있었다

     -전문-

 

 

    아직도 밥물이 살아 끓고 있는 부엌

 

    송수권

 

 

  밥물이 오래도록 끓어넘치는 것을 처음 본다

  구순의 어머니가 아직도 정정하여

  쌀을 씻고 물을 부어 밥을 안치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친구가 나고 자랐던 산골집이 아니라면

  이 시대엔 어디가서 도무지 볼 수 없는 풍경의

  하나다

  칠순을 갓 넘긴 아들에게 불땀을 지피라며

  야야라고 부르는 말도 생뚱맞지만

  장작불이 사그라들고 시룻번처럼 말라가는

  솥뚜껑 가의 오그라 붙는

  그 하얀 발풀때기 같은 것을 떼어 맛보게 하는

  그 모습도 여간 우스운 게 아니다

  나는 부삭가에 앉아 부지깽이로 불땀을 뒤적이며

  군고구마를 찾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의 눈가에도 시룻번 같은 하얀 밥물이 고여

  지난 시간들을 덧칠하는지

  수증기 같은 안개가 서려 있다 

     -전문-

 

 

  시인이 마지막으로 본 것(발췌) _ 김춘식

  이번에 『문학사상』에서 발굴한 송수권 시인의 미발표 유고작품 10편은 시인이 생전에 발표한 많은 작품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히 새롭거나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작품들은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시적 편력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발굴한 작품을 통해 송수권 시인의 시적 특질을 재음미하거나 검토하기에는 '남도 서정시'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만큼 뚜렷한 것이어서 다양한 시적 세계의 편력을 보여주었다기 보다는 일관된 시의 세계를 추구해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40여 년에 이르는 시력을 지닌 시인이지만 송수권 시인의 시적 가치는 다양성에 있다기보다는 그 깊이와 일관성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의 시가 폭이 좁은 지역성에 갇혀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지역적 특질, 흔히 지방색이라고 하는 것은 '특수한 범주'에 고착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지방색의 깊이가 미학으로 승화되는 과정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상승한다는 점에서 송수권 시인의 미학적 성취는 남도의 특수성을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정서로 이끌어 내고 있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

  *『문학사상』2017-2월호 <송수권 추모 특집/ 시의 마법과 현실의 불길한 풍경>에서

  * 송수권(宋秀權, 1940~2016)/ 전남 고흥 출생, 서라벌예대 문창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산문에 기대어』『우리들의 땅』등

  * 김춘식(金春植)/ 문학평론가, 1966년 《세계일보》신춘문예로 평론 부문 등단, 현직 동국대학교 국어국문 문예창작학부 교수, 평론집『불온한 정신』『미적 근대성과 동인지 문단』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