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色의 여름시, 응고된 부재 사이로 틈입힌 열망들
-검정, 고통의 제의
김명원
삶이란 칸트에 따르면 촉진(쾌락)과 저지(고통)간 대립적인 힘 사이에서 파생하는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 선행된 고통이 있어야 비로소 쾌락을 느낄 수 있다. 고통 없는 지속적 쾌락은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 왜냐하면 생명력의 촉진과 저지가 교차할 때 건강 상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고통은 이렇게 쾌락과 쾌락 사이에 개입하여 건강을 유지하는 게 없어서는 안될 요소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칸트는 고통을 활동의 ‘박차(der Stachel)'라고 부르고 이를 통해 인간은 진보할 수 있다고 본다. 칸트적 관점에서 볼 때 고통은 합목적적 성격을 띠고 있다. 고통에는 ’생물학적 합목적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레비나스 역시 부인하지는 않는다.
또한 고통에는 생물학적 합목적성 외에도 문화적 기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레비나스는 지적한다. 인간의 문화적 성취와 탁월한 업적은 어느 하나도 고통 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다. 학문이나 예술 심지어 정치 제도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집단이 인류 역사상에서 치렀던 고통은 어떤 무엇으로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고통 없이는 인간 역사와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좋은 것들은 하나도 가능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도서 1장 18절)라는 말처럼 고통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성과 정신적 극치의 대가’로 보인다.
언어로 자신의 치열한 예술성을 증면해 보이고자 하는 시인으로서의 고통은 욕망과 상치 된다. 세기에 남을 한 편의 작품을 남기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은 늘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불안과 공포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고통을 생산하는 까닭이다. 온 시간을 공들여 써야 하기에 힘들며, 최대 가치의 시를 쓰고 싶기에 힘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겨운 시작(詩作)을 그만 둘 수 없기에 힘든 것이다. 욕망과 부수적인 연계 관계에 놓이는 고통, 이는 시인들이 지니는 가장 궁극적인 내면의 맥락이다. 검정색이다.
정숙자 시인은 이러한 고통을 설파한다. 정숙자 시인은 시로 쓴 작시론 연작시를 선보이면서 시인으로서의 욕망과 고통을 전언하고 있다.
선택한 길은 늘 외롭고 멀다
시 향해 기도하고 시를 위해 걷는다
하루의 첫 시간과 마지막 시간
자투리 시간도 거기 바친다
시로 인해 천국을 알며 미혹에도 빠진다
영혼을 앓게 하고 자라게 하는
시 안에서 나는 수녀다
세상 일 몰라도 그뿐
주어진 만큼 허기지고 빈만큼 꿈꾼다
시는, 내 신앙이며 궁극이다
- 「나의 作詩夢」전문(『현대시』5월호)
정녕 내세가 있어 다음 생 주어진다면
그때도 꼭 시인이고자 했던
바람의 막을 내린다
한 생애를 오로지 시에 천착한 데 대한 형벌일까?
어떤 길
무슨 일이 되었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가 곧 시라는 걸 알게 되었다
- 「나의 作詩論」전문(『현대시』5월호)
정숙자는 「나의 作詩論」에서 시인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혹독한 시련과 질곡의 세월이었는지를 표명하고 있다. 시인으로서 살아왔지만, 그리고 또 현세는 시인으로 살아갈 것이지만, “정녕 내세가 있어 다음 생 주어진다면 / 그때도 꼭 시인이고자 했던 / 바람의 막을 내린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끝없이 바라는 유구한 욕망과 영혼의 방황과 겉잡을 수 없는 허황의 다의적 의미를 동시에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의 막’은 슬픈 은유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한 생애를 오로지 시에 천착한 데 대한 형벌”이었다고, 전혀 일상으로 편입되지 않는 뜨거운 고통을 토로한다.
고통의 이유는 인용시 「나의 作詩夢」에 잘 나타나 있다. 시인으로 “선택한 길은 늘 외롭고 멀”었으며, “하루의 첫 시간과 마지막 시간”에다 “자투리 시간”까지 바쳤으며, 그로 인하여 “천국을 알며 미혹에도 빠”졌기 때문이다. 결국 “영혼을 앓게 하고 자라게 하는 / 시 안에서 나는 수녀”였기 때문이다. ‘수녀’는 속박된 삶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는 반어적 속성을 가진다. 평생을 신을 위해 헌신하고 종속되면 그 비하의 위치까지 기쁨으로 승화하는 절대 정신을 이미 자신의 몸을 수도복으로 두른 억압 내에서 가능하다. 즉 속세적 시간의 죽음을 생의 소실점에 고통으로 귀속시킴으로서 고통을 극복한다는 부조리한 논리를 시인은 빌어 온 것이다. 시인으로서 시를 어떻게 찾고 생산해 내는지, 애 저린 생을 충분히 조감해 내고 있다.
*『서시』2007-가을호 <계간시평>에서
--------------------------------
* 김명원/ 충남 천안 출생, 1996년『시문학』으로 등단
'평론가가 읽은 나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한용_행위가 이루어지는 지점 (0) | 2013.01.14 |
---|---|
입속의 공/『시현실』편집위원들이 읽은 지난 계절의 좋은 시 (0) | 2013.01.14 |
이병헌_현실과 시적 환상/ 붕우유친 : 정숙자 (0) | 2012.09.21 |
산다는 것의 의미 : 환상과 실재의 거리/ 김석준(시인, 문학평론가) (0) | 2012.03.20 |
금은돌_통변通辯하라, 변화와 진통 속에서(발췌) (0) | 2010.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