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산다는 것의 의미 : 환상과 실재의 거리
김석준(시인, 문학평론가)
문학은 세계의 바깥으로 탈주하기를 열망하는 기호들의 불규칙한 운동이다. 문학은 말해질 수 없는 것에의 유혹의 손길이자 카오스를 법칙으로 수렴시키는 단속적인 운동이다. 문학은 현실이 아닌 미지의 공간으로 휘어져 실재의 존재 방식을 일거에 전도 전복시키는 휨 작용이다. 문학은 비존재나 무존재를 현전의 장으로 불러내어-말 한계를 돌파하는 신기원에의 향성이다. 만약에 이제까지 전개된 문학의 존재방식이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면, 문학이 진정 감당해야 할 몫은 무엇인가. 도대체 문학이 시간과 공간 사이를 어떤 미적 형식으로 건널 때 문학은 자신의 미적 현실성을 이 세계에 현시했다고 말하는가. 생이 자꾸 無라는 미지의 공간 속으로 산입되어 스스로를 허무로 이끈다고 가정할 때, 문학은 자신의 공간 내부에 어떤 의미의 기호를 색인하게 되는가. 생에의 흔적과 차이와 반복 사이를 시간의 형식으로 종주하는 것이 삶인 한, 문학은 동일한 것의 반복을 차이로 부조시켜 언어가 삶을 대리 표상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문제는 사이의 삶이다. 문제는 차이를 기입하고 동일한 것의 반복을 거부하는 사이의 삶의 형식이 늘 우발적이다 못해 특발적인 것을 욕망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삶은 사이의 거리를 확인하는 과정이자, 그 거리 내부를 강렬한 강도로 살아낸 흔적이다. 말하자면 산다는 것은 사이에서 빚어지는 역동적인 운동이자, 그 사이를 실재와 환상으로 봉합하는 의미적 거리라 하겠다. 분명 거리 확보가 미적 현실성의 현재와 그것의 미래지평을 온몸으로 체현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술이 처한 미적 총체성의 면모라 하겠다.
문학이 표현이라는 動線 위를 규범이라는 괘도와 탈주라는 이중의 원리로 넘나들기는 하지만, 그것이 궁극에 가닿는 지점은 사이의 삶이고, 그것의 의미이다. 삶은 사이에 위치해 있고, 사이가 만들어 놓은 거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산다는 것의 의미는 사이에 놓여 있다.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생이 아닌 곳에 위치할 때만 가능하다. 생의 역사가 죽음의 역사로 환치되는 한, 우리는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모른다. 삶의 한 축이 실재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다면, 그것의 다른 한 축은 너무도 헐거워 이 세계가 아닌 곳으로 훨훨 날아다니며 비존재가 존재를 대리표상하게 된다.
엄밀한 의미로 말하자면 우리는 실재도 모르고 환상도 모른다. 삶이 환상과 실재 사이의 거리나 강도로 수렴되고 환원되는 한, 우리는 절대라는 대타자를 장님 문고리 만지듯이만 안다. 모른 것도 아니고 정확하게 아는 것도 아닌 그것에 환상이 있고, 실재가 있다. 분명 인간학이란 실재의 추구 과정이다. 환상과 실재 사이의 관계는 대칭이 아니라 비대칭이다. 실재가 냉혹한 시간의 형식으로 이 세계를 지배하는 현실태라면, 환상은 왜곡되고 전도된 현실에 대한 망각의 작용이거나 그것의 대타적 의식이다. 실재와 환상의 관계는 찌그러져 있고, 환상이 실재를 비딱하게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는 환상이 문제의 중심이 아니라, 그 삐딱함을 강요하는 실재의 존재론적 위치가 환상의 토포스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재가 광폭하게 인간학적인 삶 전체를 옥죄고 강박하게 되면 환상의 현실의 도피나 퇴행으로 추락하게 된다. 이때 이 도피적 환상은 일종의 심리적 방어기제이거나 정신병리학적인 징환(징후+환상)이라 하겠다. 자본적 이념이 모든 것을 영토화하고 인간의 정신구조를 분열에 이르게 하는 한, 환상에 빠지는 것은 필연이다. 21세기의 현실적 지평이 겁나고 두려운 것은 실재의 광폭한 작용이 만든 위압적인 자세 때문이 아니라, 디지털 미디어와 결합한 환상이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현실을 창조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은 복제 이미지의 다양한 순열 조합들로 둘러쳐져 있는 매트릭스이거나 실재가 만들어 놓은 환멸의 像인지도 모른다. 곡해가 일어나고 조직적인 왜곡이 겹쳐진다. 뇌의 전전두엽이 교란되고, 복제 이미지의 침공에 모든 판단이 흐려져, 그저 이미지가 만들어 놓은 환상을 탐닉하면 그만이다. 21세기의 환상이 소름끼치게 무섭고 공포스러운 것은 실재를 무기력하게 압살하여 이미지 앞에 실재를 무릎 꿇렸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실재는 존재의 심급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의미를 실현하는 미적 현실성도 아니다.
분명 이미지의 세기로 호명되는 21세기를 가로지르는 횡단면 내부에 환상이 촘촘하게 저며져 있고, 또 그 환상 내부에 새로운 미가 현동할 수 있는 미묘한 의식의 지점이 잠재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환상 그 자체가 산출하는 미적 효과가 아니라, 그것이 실재와의 관계를 통해서 양산해내는 인륜적 삶이 어떤 양태를 띠고 있는가가 문제의 관건이다. 만약에 21세를 관류하는 환상의 존재론적 양태가 징후와 결합한 징환의 형태를 띠고 있다면, 환상의 그리 건강한 미의 현실성을 정초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자본과 결합한 디지털 미디어가 환상의 미래를 더욱더 정교하게 현실화시켜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환상을 만들어가겠지만, 환상이 처한 미적 현실성은 치료받아야 할 상처 난 영혼의 표지에 다름 아니다. 아니 환상은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 늘 양가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환상이 처한 딜레마이다.
이를테면 환상은 무의식 어딘가에 침전된 실재의 압축 전치된 또 다른 모습이거나 그것의 왜곡된 이미지이다. 환상은 문제적인 그 무엇이다. 환상의 표정은 실재의 표정이다. 환상의 표정읽기는 실재의 返照하는 역투사작용이다. 역으로 그것은 환상 이미지의 탐구가 실재의 존재론적 위치를 결정한다는 말과 같다. 사실 자본의 이념과 철저하게 의기투합한 디지털 미디어가 지배하고 있는 21세기는 이미지의 천국이다. 실재는 주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주인으로 호명되지도 않는다. 이제 디지털 이미지와 환상의 극적인 결함은 실재를 이중으로 압박하여 실재 스스로가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온 세상에 이미지가 둘러쳐져있고 환상이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이 세상은 온통 화려한 이미지가 뿜어내는 열기에 현혹되어 그저 향락에 빠져들면 그만이다. 주이상스가 최대의 목적이고, 차선책은 그 이미지의 열기에 도취되어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이미지와 결합한 21세기의 환상은 그것이 긍정적일 때 퇴행으로 추락하고 그것이 부정적일 때 편집증적 분열에 이르게 된다. 실재의 실체성은 은폐 엄폐되어 온 데 간 데 없고, 그저 존재하는 것이라곤 가상뿐이다. 나는 나의 나됨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 미셀 푸코가 고민했던 인간학적 아포리아는 이미 소멸시효가 다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환상이 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관계는 단절되고 인간학은 함몰된다. 환상의 정단층이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피터팬증후군에 빠져 성장이 멈춘 유아적 공상의 지대를 배회하고 있다면, 그것의 역단층은 삶-시간-세계 전체가 환멸 가득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환상은 건강한 정신의 구조가 아니다. 환상이 실재와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는 한, 그것은 병든 자아의 초상이거나 인간학적인 공간이 환멸로 차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중략)
길의 오른쪽은 홀수이거나 짝수다
길의 왼쪽 또한 홀수이거나 짝수다
페이지가 매겨진 건 아니지만
간기(刊記)가 묶인 건 아니지만
두 쪽으로 펼쳐져 역사를 운반하는
길
은 지금 내 오른쪽엔
가도-가도 신간(新刊)이다 개천이
꾸물대고
고가도로 희롱하는 뭉게구름
시시각각 윤곽을 점검하며
새롭게
신만이 시간에 난다
구애받지 않는다
일초일순
촉박할
수밖에 없는 나는 산책로에서 간신히
책을 읽다가 아하 내가 책갈피였구나
그렇다면 이 방대한 생존의 실록에서
길 좌우 쪽 녹슬지 않게 좀먹지 않게
-정숙자,「노력을 소비할 것」전문
인간학을 궁극적으로 지배하는 실재는 시간이다. 시간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스스로를 이룩하는 한, 시간은 환상이고 징환이다. 시간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저 시간의 뒷덜미에 사로잡혀 환상을 향유하거나 징환에 빠진 채 허덕이게 된다. 이를테면 시간은 모든 환상이 일어나게 되는 궁극적인 근원이다. 시간 내부에 도주선이 그어져 모든 인간학적인 사태들을 탈주시킨다고 가정할 때, 삶-시간-세계를 환상으로 이끄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의 지형도에도 불구하고 시간 내부를 환상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상은 개연적 사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담론적 사유의 지층을 형성하는 토대도 아니다. 환상은 신화적이지 않다. 환상은 사실을 지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이 아닌 곳이나 사실이 될 수 없는 곳으로 휘몰아쳐 시간 전체를 정지시켜 버린다.
병이 든다. 환상이 역사나 인간학의 주류가 아니라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환상 내부에 병든 자아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환상으로 인해 문학의 미적 지평이 무한히 넓어지기는 했지만, 환상은 환멸적인 현실을 오묘하게 위장하는 일종의 전술이자 지배의 도구라 하겠다. 그런데 정숙자 시인의「노력을 소비할 것」은 시간의 전방위적인 운동을 “길의 오른쪽”과 “왼쪽”에 콤팩트하게 기록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역사”라고 호명하고 있다. 시인에게 시간은 결코 환상일 수 없다. 시간은 생에의 흔적들이 기록된 “간기(刊記)”이거나 새로운 사람이 현동하는 “신간(新刊)”이다. 설령 “역사를 운반하는/길”이 미지로 휘어져 불규칙하게 삶을 실어 나르지만,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길 좌우”에 인간학을 색인하게 된다.
우연이 요동치고 “시시각각” 새로운 존재의 길이 삶의 “산책로”를 만들어가는 반면에, 역사는 “방대한 생존의 실록”을 편찬하여 시간의 “윤곽”을 투명하게 부조시킨다. 시간의 길의 왼편에 들어서면 불길하고 음험하여 죽음의 공간이 이입되고, 길의 오른편으로 휘어지게 되면 시간은 상서로워 아름다운 몽상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물론 정숙자 시인의 그것이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인간학적인 운명성을 도도한 역사의 물굽이에 응고시켜 형상화하고 있지만, 어쩌면 시간을 사유하는 자나 시간 내부에 위치한 산책자만이 시간의 한계를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인지도 모른다. 역사의 책갈피를 세밀하게 읽고 또 스스로가 책갈피가 되기도 하면서, 정숙자 시인의 진정한 역사의 참모습을 인간학적 흔적으로 재구하고 있다 하겠다. (하략)
*『시와환상』2012-봄호/ 리뷰_김석준「산다는 것의 의미:환상과 실재의 거리」부분
* 김석준/ 충남 아산 출생, 1999년『시와시학』시-등단, 2001년『시안』평론-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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