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시적 환상
이병헌(문학평론가, 대진대 교수)
척박한 현실 속에서 피폐한 나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나름대로 힘을 모아 현실을 타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우선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는가를 반성하며 최대한의 노역과 내핍 생활을 감내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의 노력이 한계에 이르고 자본가 혹은 사용자로부터 인간 대접을 못 받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거나 상대적으로 풍요롭고 안온한 생활을 하는 계층과의 괴리를 의식하게 되면 이들은 반발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이때 그들은 많은 경우 상황 회피, 자포자기 혹은 자기 연민의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시인의 현실 대응의 양상 또한 이러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학작품에서의 현실대응 양상 가운데 현실 타개의 모습과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환상적 해결’의 방식이다. 그 가운데 일부분은 궁극적으로 라캉이 주이상스라고 명명한 성적 극치감에의 지향과도 닿아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극단적인 형태시나 당대 시어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되는 막말이나 외설적 표현 등도 유사한 효과를 갖는 것이라 생각된다. 소설 등 다른 장르에서도 이같은 ‘환상성’이 활용되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본질적으로 시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중략)
그림자들 결속이 무한하다
어떤 그림자도 색깔 바꾸지 않는다
빛 없는 데 튀어나오지 않는다
본체가 죽은 뒤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감정을 노출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본체를 빼앗지 않는다
다른 이의 본체와 그림자 사이 끼어들지 않는다
본체가 하찮을지라도 떠나지 않는다
그림자가 남아 있는 한 티끌도 생명을 인정받는다
그림자만한 붕우가 또 있을까
그림자는 언제 어디서든 순장(殉葬)은 물론
어느 때 한 번 키를 세우려고도 않는다
바닥은 밑에 있는 하늘이라고
바닥은 밑에 있는 하늘이라고
그 허공 헛디딜까 본체 아래 엎드린다
(내게도 그림자 있어) 절대 고독, 절대 부족, 절대 불행이란
있을 수 없다. 신발 닦아 신어야겠다
- 정숙자, 「붕우유친」전문,『문학청춘』(2012년 여름호)
정숙자의 「붕우유친」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 ‘고독, 결핍, 불행’ 등을 ‘그림자’의 존재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위로 받고자 하는 심정을 그리고 있다. 화자는 그림자가 본체를 끝까지 따라다니면서도 그를 넘어서려하거나 배신하지 않고 그가 죽을 때 산 채로 그를 따라서 무덤에 들어가는 ‘순장’까지도 불사하는 충직함을 특성으로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못난이이거나 잘난 사람이거나 가리지 않고 이 그림자를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에게는 ‘절대고독, 절대부족, 절대불행’이란 없다는 것이다. “신발 닦아 신”고 걸어야겠다는 것은 그토록 소중한 우리의 친구 ‘그림자’를 늘 염두에 살아야겠다는 다짐이다. 인간사를 벗어난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 비현실적인 듯하지만 시적 환상을 부르는 장치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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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청춘』2012-가을호〔줌렌즈의 좋은 시➅〕에서
* 이병헌/ 서울 출생, 1989 『현대시학』으로 등단, 저서 『한국 현대비평의 문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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