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_ 제2회 부석 평론상_수상소감>
더 큰 코뮌을 위하여
오민석
90년대 초, 시와 평론으로 등단해 잠시 활동을 한 이후 근 이십여 년 동안 저는 문단을 떠나 있었습니다. 시도, 삶도, 정치도 모두 시들시들해져서 저는 그만 생계와 영문학의 배를 타고 긴 유랑을 떠났던 것이지요. 거기에도 나름 환희와 고통이 없지 않았지만, 오랜 방황 끝에 저는 "나는 문학에 불과하며,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없고, 그러기를 바랄 수도 없다"는 청년 카프카의 고백이 그대로 저의 고백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작년에 저는 무려 23년 만에 『그리운 명륜여인숙』이라는 두 번째 시집을 들고, 저의 고향, 문학의 나라로 다시 귀환했던 것이지요.
애초에 시와 평론을 동시에 시작했던 터라, 시와 비평은 저에게 일종의 동지적 관계, 즉 코뮌(commune)이었습니다. 문학과 비평은 모든 형태의 상투성을 조롱하고 규범을 의심하며 궁극의 자유와 해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동지입니다. 문학이 먼저 세계에 말을 걸고 무형의 세계에 언어의 옷을 입힐 때, Engels도 지적했지만, 문학은 메시지의 메가폰이 아닙니다. 문학은 두 개의 입을 가지고 있어서, 한 입으로는 웅변을, 다른 입으로는 침묵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문학은 곧 '침묵의 웅변'인 셈인데, 비평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텍스트가 침묵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웅변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으므로 비평은 그것을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평은 텍스트의 재탕이나 반복이 아니니까요. 마슈레이P.Macherey의 말마따나 텍스트는 침묵하고 있는 부분에서 더욱 많은 것을 말합니다. 비평은 텍스트의 침묵을 열어 의미의 전압을 높이는 일종의 '부스터booster'이지요. 문학의 매혹은 비평 행위를 통해 더욱 증폭됩니다.
문학과 비평은 또한 어떤 형태의 위계도 거부합니다. 가령 비평이 창작을 선도해야하며, 따라서 비평의 위기가 창작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주장은 얼마나 '가벼운 교만'인가요. 문학과 비평은 주인의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더 큰 적들과 싸우는 코뮌의 평등한 구성원들입니다. 문학과 비평은 하나의 코뮌 안에 있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기능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두 기계는 따로 놀지 않으며, 함께 접속될 때 놀라운 힘으로 전화됩니다. 블랑쇼M. blanchot가 『문학의 공간』에서 릴케와 말라르메와 카프카를 읽어낼 때, 우리는 문학과 비평이 만나 이루는 놀라운 코뮌의 힘을 발견합니다. 물론 같이 놀다보면 싸움도 일어나겠지만, 그 모든 갈등은 코뮌의 미래를 위한 것이니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요.
이번 수상작으로 결정된 제 글 「비평, 관계 혹은 타자성의 수사학」은 이런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을 때마다, 아직도 '멀고, 멀고, 멀었도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제발 좀 더 잘 써줄래'라는 격려의 채찍으로 알겠습니다. '부석 평론상'을 만들고 실행하고 또 저에게 상을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더 잘 쓸게요. ▩
※ 심사위원 : 이성혁 · 김종태 · 권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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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표현』2016_12월호 【특집|제2회 부석 평론상】에서
* 오민석/ 1990년『한길문학』창간기념 신인상에 시 당선, 1993년《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그리운 명륜여인숙』『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론서『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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