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연꽃 같은 세상을 꿈꾸며/ 원담

검지 정숙자 2016. 11. 20. 00:11

 

 

<창간호 / 권두언>

 

 

    연꽃 같은 세상을 꿈꾸며

 

     원담 (시인/율곡사주지)

 

 

  당신은 무사하십니까?

  이제 우리는 '무사함'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동안 '지진'이란 이웃나라 일본의 일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도 지진으로 인한 공포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제난 9월 경주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은 추석 무렵 온 국민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했고 그 불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당연히 정부에서는 국민의 안전을 위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을 것이며, 국민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또한 이러한 자연재해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이어서 그 누구를 탓하거나 원천적으로 일어나지 못하게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 사후 대책에 있어서 얼마나 피해를 줄이는가는 정부의 힘과 지혜이며, 그것이 국가의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생애 처음 '지진'에 대한 공포를 느끼면서 과연 우리의 삶에 지진만이 불안이고 공포인가를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참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연재해로 겪는 참상에 버금가는 일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사건, 사고는 일침이 되면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언론매체를 접하기가 무서워진다. 비리, 뇌물, 청탁, 폭력, 살인, 자살 등의 단어들은 그 주체가 누구든 간에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불안하거나 불쾌해진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무자비하게 보고 듣게 되는 현상이며, 우리 사회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오욕탁세(五慾濁世) 인 셈이다.

  가을이다. 결실의 계절이며 풍요의 계절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풍요와는 너무나 돌떨어진 나날들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우리 사회 구성원 중 일부는 물질은 물론 정신의 풍요까지도 만끽하고 있겠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물질적인 빈곤과 함께 정신적인 피폐함에 놓여있다. 이러한 나날들이 이어지는 속에서 한동안 우리사회에 유행하였던 '맑고 향기로운 세상'이라는 구호가 생각난다. 여기서 '맑고 향기로운'의 상징은 연꽃이다. 맑고 향기로운 꽃이 비단 연꽃뿐이겠는가? 그런데 굳이 꼬집어 연꽃을 지칭하는 것은 연꽃의 생장형태에 연유한 것이라 본다. 불가(佛家)에서는 일승(一乘)의 가르침을 연꽃의 생장 형태를 비유로 삼고 있는데, 진흙 속에 뿌리 내린 연꽃은 진흙 속에서 나왔으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자태와 맑고 고운 향기를 세상에 내놓고 있음에서 연꽃의 본성을 본 것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험악한 사고와 사건들, 국민을 섬기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국민을 호령하는 인사, 그에 더해 뇌물과 청탁으로 얼룩진 그들의 자화상, 불신과 불만을 타인의 몫으로 돌리는 풍조, 이러한 것들이 풍기는 냄새로 우리 사회는 역겹고  비리다. 그러나 그것을 탓만 하기보다는 이제는 제 각각 자신의 본성을 찾아갈 때이다. 진흙 같이 더럽고 질척거리는 곳에 속해 있더라도 나 자신이 그 곳에서 솟아 나와 내가 가진, 나만을 꽃대를 밀어 올려 나만의 꽃을 피워 낸다면, 너와 나 모두가 그러하다면 세상은 그 꽃들의 향기로 맑고 아름다워지지 않겠는가.

  9월의 막바지 절기는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었는데, 올 여름 유래 없이 더웠던 잔상인지 연밭에 가면 아직도 간혹 푸르른 연잎들 속에서 고운 자태를 숨기고 있는 연꽃을 만난다. 그 꽃이 내보이는 향기나 자태는 다시 새롭고, 경건하기까지 하다. 비록 제철인 한여름 따가운 햇살 아래 그 청아하고 기품 있는 자태를 뽐내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자신 안에 심어져 있는 꽃 봉오리를 밀어 올린 가을 연밭, 그 세계가 참으로 아름답다.

  자성이 청정하면 처한 곳 또한 '처염상정(處染常淨)'한 세계이며, 바로 그곳이 고통이 없는 불국토의 세계인데 연꽃 같은 세상 꿈꾸어 볼만하지 않은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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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불교문예마하야나 MAHAYANA창간호/ 2016_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