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의 엄마, 엠마 프라이징거 여사
원준희
엄마가 어린 자식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돌보듯 장갑도 끼지 않고 환우들의 상처를 짜내고 바르는 치료에 온갖 정성을 다 들이고 밤낮없이 팔다리를 주무르는 따뜻한 엠마 여사를 이름과 비슷해서 아예 엄마라고 부른다.
1932년 아름다운 숲과 음악의 나라, 오스트리아 찰스부르크 근처 엡스터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 건축가인 아버지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비엔나 간호전문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하와이 폴로카 섬에서 한센병 환자를 위해 헌신하시다 나병에 감염되어 돌아가신 벨기에 국적 다미안(1840~1889) 신부 전기를 읽고 감동되어 나환자를 위한 해외봉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로 떠나려고 하였으나 한국에서 유학 온 신부의 동란 후 어려운 실정과 특히, 한센인들의 딱한 처지를 듣고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1961년 29세에 경북 들꽂이마을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선진국에서는 치료 가능한 피부병인데 무서운 천형으로 자포자기하거나 경계하는 인식부터 바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먹을 것, 입을 것도 없고, 치료약도 형편없이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한센인 정착촌에서 함께 지낸 그는 애초 계획했던 2년을 훌쩍 넘어 5년 만에 고향 오스트리아로 첫 휴가를 떠났다. 5년 만에 돌아온 딸을 보며 그의 부모는 눈물을 훔쳤지만 '네가 우리에게 잘한 것처럼 그분들에게 잘 해줘라'며 한국에서의 삶을 허락했다. 다시 짐을 꾸려 한센인 곁으로 돌아왔다. 고국을 떠나올 때 결혼을 약속한 연인도 있었지만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 사람과 일생을 함께하면 돌봐줄 사람이 내가 아니어도 되지만, 한국의 한센인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기에 그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1966년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칠곡 가톨릭피부과의원의 원장 겸 간호사로 근무했다. 1971년 국내 직장인들로 구성된 한센인을 돕는 릴리회를 설립하여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 부인회가 장학재단을 만들어 많은 학생에게 혜택을 받도록 주선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한국의 은인 나라다.
여사는 1991년 제3회 보건대상, 1992년 세계 도덕상, 2007년 호암대상을 수상하였다. 1996년 칠곡 가톨릭피부과병원 원장 자리를 퇴임하고서도 여전히 정착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태어난 고향이지만 한국은 내 삶을 이뤄준 고향이다.'라며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 계속 봉사하겠다고 밝혔다. 경북 군위군 가톨릭 묘원에 묻힐 자리를 마련했다.
봉사 50주년(2011.4.40.)을 겸사해서 한타순교성지에서 여사의 팔순행사가 있었다. 소록도 등 전국에서 900여 명의 하객이 모였다. 반백년 치료해준 한센인과 관계인 등이 모인 자리다. 한센인들은 옥색 치마에 파란색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프라이징거 원장을 엄마라고 부르며 100살 넘도록 건강하게 살면서 자신들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한때는 사람으로 대하지도 않고 짐승 쫓듯이 돌멩이를 던지는 자가 있었고 혐오스러운 모습에 질겁하여 달아나던 자들이 허다했기에 얼마나 속이 아팠겠는가.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 길, 보리피리, 파랑새 등에서 삶의 처참함을 읊었음과 같이 너무 힘겨웠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훤칠한 키에 아름다운 마음씨와 봉사의 삶으로 다져져 반백이 된 그의 모습은 수려하고 고상한 품위와 더불어 인자한 어머니였다. 이날 오스트리아 정부는 주한 대사를 통해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지금도 틈틈이 전국의 한센인 정착촌 28곳을 순회하고 있다.
평소 하느님과 대화를 묻는 기자에게 '모든 것을 다 잃어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요. 병이 들고 먹을 것이 없더라도 믿음만은 잃으면 안 돼요. 왜냐면 믿음 하나만으로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믿으면 이만큼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요.'
자신의 나라도 아닌 타지에서 그토록 헌신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고귀한 일이다. 나에게도 과연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좀 더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염원을 품고는 있다. 자신을 위해 순간적으로는 행복할 수 있어도 영원히 행복하진 않다는 신념과 의지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갈 프라이징거 여사의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해본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살아있는 성녀라고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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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北文學』276호/ 2016.10.28. 發行
* 원준희/ 전북 군산시…,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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