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바다』2016-가을호 <화보/ 풍경과 상처 12>_ 김점용
민지의 꽃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말없이 손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전문-
▶ "질경이 나생개 토끼풀 억새"는 '꽃'일까요, '잡초'일까요? 이름이 있으니 잡초는 아니지만 산과 들 어디서나 볼 수 있으니 그냥 '풀'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 이름 붙이기(命名)인데, 그 흔한 것들을 모아서 '잡초'라고 부르는 사람과 '꽃'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인식의 스케일 자체가 다르겠지요. "꽃이야"라는 민지의 대답에 그냥 풀이라거나 잡초라고 말하려던 우리들의 입이 다물어지는 건 민지의 스케일이 우리의 스케일을 압도하기 때문이지요. 천지와 귀신까지 감동시키는 민지의 스케일은 곧 이것저것 분별하지 않고 우주의 그릇에 다 담을 줄 아는 시인의 스케일일 테고요. (김점용/ 시인)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화해*/ 김수복 (0) | 2016.10.04 |
|---|---|
| 억울한 것들의 새벽/ 이건청 (0) | 2016.10.03 |
| 그믐/ 이용헌 (0) | 2016.10.01 |
| 사과에 대한 미신/ 이용헌 (0) | 2016.10.01 |
| 내구연한(耐久年限)/ 이승부 (0) | 2016.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