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언젠가는
최승호
언젠가는 나 없는 버스정거장에
키 큰 바다풀이 서 있으리
23-1
언젠가는 나 없는 지하철역에
펭귄들이 서 있을까
23-2
언젠가는 나 없는 지하철역에서 누군가가 열차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처럼 바지를 입고 나처럼 구두를 신고 나처럼 가방을 든 채 말이다. 오래전에 발굴된 직립인간의 동작을 흉내 내듯이 그는 두 팔을 앞뒤로 흔들고 두 발을 번갈아 내밀면서 계단을 내려와 둥근 시계를 쳐다볼지도 모르겠다. 아홉 시, 얼마나 많은 아홉 시들이 있었던가.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아홉 시들이 있었고 아홉 시에 굴러가는 바퀴들과 아홉 시에 사라지는 날개들이 있었다. 언젠가 나는 부재지만 당신도 부재고 불어나는 인류 전체가 부재다. 지하철역의 큰 거울 앞에 서서 부재를 기념하는 독사진을 한 장 박아둘 것.
23-3
수족관 풀 뒤에 숨어 있는 해마를 보면
해마는 소심하고 수줍고 우울한 것 같다
수족관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해마의 외로움을
바닷속 해마들은 짐작이나 하고 있을는지
*시집『아메바』에서/ 초판발행 2011.1.20 (주)문학동네 펴냄
*최승호/ 강원도 춘천 출생, 1977년『현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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