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평론에게/ 장석원

검지 정숙자 2016. 7. 14. 22:12

 

 

   시와표현 기획특집 _ 쓰고 싶은 평론

 

 

    평론에게

 

    장석원

 

 

  나는 평론가가 아니다. 나는 평론을 잘 하지 못한다. 평론의 목적과 방법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좋은 평론을 하고 있는 훌륭한 평론가가 우리 시단에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소수의 그들에 의해 한국 현대시는 조금씩 미래를 향한 전진을 이루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신뢰를 주는 그들이 없다면 한국 현대시의 오늘은 1930년대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좋은 평론이란 무엇인가.

  답을 말하기 전에 지금 시를 둘러싼 평론의 현재진행형을 말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많은 시인, 많은 시집, 많은 출판사, 많은 문학상으로 포화되어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시를 주력으로 평론하는 평론가들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대학과 연구소를 직장으로 선택하고 있고, 또한 그들 대다수는 '먹고 살기 위해' 대학이 요구하는 문학 연구를 도외시할 수가 없다. (현대문학과 연관되는 학술대회에 참석해보면, 얼굴을 잘 알고 있는 평론가들을 만나기가 매우 쉽다. 이 학회에는 어떤 분이, 저 학회에는 다른 어떤 분이 학회의 회장이다. 젊은 평론가들은 그 학회의 이사나 간사를 맡고 있다. 그곳에서 그들은 평론가가 아니라 연구자로 활동한다.) 평론과 연구라는 과중한 이중 '노동' 때문에, 업적 평가에 반영되는 점수를 따기 위해 논문을 찍어내야 하는 현실 때문에, 한 두 권의 평론집을 어렵게 출간하고, 몇몇 단체에서 순번대로 시혜하는 문학상을 한 두 차례 받고, 대학에 정규직으로 자리를 잡은 중견 이상의 평론가들은 제대로 평론에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을 수 없다. 가끔 시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이 평론으로 등단하면, 수많은 시 전문지들의 월평, 계간평, 서평의 수요가 신인들에게 집중된다. 그들은 행여 청탁을 거절하면 '찍힐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여기저기서 요청하는 호출과 낙점에 충실히 복무한다. 그들도 서둘러 문예지의 편집위원이 되어야 하고, 빠르게 주목할 만한 평론을 써내어 문단의 이슈로 성장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지명도를 높이지 않으면, 그 사람 평론 잘 쓴다는 입소문이 퍼지지 않으면, 결국, 흔적 없이 사라지기 쉽다. 열심히 해야 한다. 무조건 써내야 한다. 더군다나 자신의 작품성과 무관하게 시인들에게 주례사 비평을 선물한다. 인맥과 학연과 지연이 종합적으로 작동한다. 특정 대학의 문예창작대학원을 중심으로 저명한 평론가와 덜 저명한 시인들이 연합한다. 조금이라도 인정받으려면 그 길을 따라야 한다. 상황은 점점 복잡해진다. 이것은 지켜내야 하고, 저것은 포기할 수 없다. 딜레마가 아니라 트릴레마이다. 질곡이 따로 없다. 어떤 소수에게는 즐거운 비명이겠지만, 다른 다수에게는 절망적 신음이다. 신인 평론가들이 짊어진 노동의 과부하, 중견 평론가들이 틀어쥔 권력의 집중화,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그렇고 그런, 도무지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찬사와 아연실색하게 하는 오독이 흘러넘친다. (이제까지 내가 평론이라고 써 갈긴 글들 역시 이러했다고 자인한다. 이 글은 나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평론가가 아닌 내가 더 이상 평론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에게는 평론과 평론가를 비판할 자격도 권한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 밑에 시인이 매달려 있다. 좋은 관계는 좋게 이어져야 한다. 평론가님과 시인님, 서로가 서로를 선생님으로 부른다. 서로에게 존경한다고 영색(令色)한다. 관심과 지분을 나누어야 한다. 관계가 틀어지면, 평론가에게는 분노와 증오의 화살이 쏟아지고, 시인에게는 소외와 무시의 칼날이 겨눠진다. 시인과 평론가의 공생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비판'이란 있을 수 없다. '좋은' 평론이란 허울에 불과하다. 문단의 질서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벌 있을 진저. 그것을 '파토' 놓은 자에게 멸망의 불세례를 퍼부어라. 우리 시단 전체가 이렇다는 말은 아니다. 좋은 시인과 좋은 평론가들이 더 많기 때문에, 우리 시는 뛰어난 성취를 확보하고 있다. 좋은 시인과 좋은 평론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나쁜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방법은 무엇인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은가. 당신은 그 권력의 강역에서 벗어난 적이 있는가. 빠져나갈 용기는 있는가. 그릇된 인식으로 자신을 망치고 싶은가. 왜 나서서 질서를 어지럽히는가. 당신이 혁명가라도 되는 줄 아는가. 쓰고 싶어서 시 쓰고, 계속 쓸 것이 생기는데, 시가 여기에 있는데, 왜 시와 평론의 관계를 부정하려고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좋은'이라는 수식어의 답을 찾기 위해 우리가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하는 것들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병기, 정지용, 이태준, 오장환의 공통점. 나이와 장르로 볼 때, 상관관계가 없을 것 같은 이들은 '휘문고보'와 연관된다. 휘문을 공유하는 정지용과 이태준은 현대문학사에서 중요한 기지 역할을 담당한 <文章>의 주인이었다. 한 사람은 현대시의 아버지라 불리고, 다른 한 사람은 한국 현대 단편소설 미학의 완성자로 여겨진다. 위 4인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그들이 평론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1930년대에도 평론가는 있었다. 대부분 창작과 평론을 겸업했다. 임화와 김기림이 그렇다. 전문적인 평론가가 권력을 쥐고, 문단을 주도하고, 문학사의 전면에 나섰던 본격적인 계기는 1960년대의 <창비>와 <문지>의 창간이었다(고봉준, 「'창비'라는 사건, 계간지의 탄생」, 『파란』창간호, 2016.3. 166~185면 참조). 창비는 서울대 영문과, 문지는 서울대 불문과라는 경계선을 지닌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구분점 안의 영문과와 불문과라는 작은 구분점이 외부의 경계이다. 외국문학 전공자들과 평론가라는 작은 구분점이 외부의 경계이다. 외국문학 전공자들과 평론가라는 하위 구분점이 내부의 경계이다. 이러한 이중성이 작동되면서 1960년대 이후의 현대문학사가 오늘까지 이어진다. 평론이 담론을 생산하고 시와 시인을 지도하고 문단의 권력을 행사하는 상황이 현실이다. 영어와 불어 또는 영문학과 불문학이라는 '이식'된 문학 이론과 철학이 한국어로 쓰는 한국의 현대시와 그것의 '서정'과 감각과 인식을 포위하고 압박하고 편달한다.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서구의 그것이 틀렸다는 말도 아니다. 나는 다만 문학사의 사실을 예시하고 있을 뿐이다. 평론과 이론과 철학이 하나가 되어 '저 위'에서 시와 시인을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국문과는 어디에 있었는가. 시인과 소설가는 문예창작학과가 공급했다. 국문과는 '성스러운' 연구에 매진했다. 어느 순간부터 시인과 소설가들이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시인과 소설가들은 문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평론가들에게서 열심히 이론과 철학을 공급받는다. 문제는 평론가들이 이제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영문학이나 불문학이나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다는 점, '文史哲'이 대학에서 퇴출되고 있는 상황에 직업으로써의 교수 정원이 확보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더 많은 학생 수를 확보하고 있는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정말로 교육부의 정책 때문에 벌어진 것인가. 2000년대 중반 미래파 논쟁에는 공과와 허실이 있었다. 이 문제의 언급은 나의 능력을 벗어난다. 그 사건의 중요성을 논하자는 것도 아니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문학사는 '미래파'라는 용어를 기재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에 그 논쟁을 시작했고 주도한 논객이 국문과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평론가로서 논쟁을 기획하고 실행했지만, 그는 또한 시인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 현대문학사를 구성하는 사건의 중심이었던 <文章>의 정지용이 이후 문학사를 어떻게 구성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본다. 정지용은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을 발굴한다. 현대시의 아버지가 현대시의 아들들을 직접 선발한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도래했다. 시인이 시인을 '등단'시키고, 선배 시인이 후배 시인의 시에 대해 평론한다. 좋은 시인이 좋은 시인을 알고, 좋은 평론이 좋은 시를 분별하는 예가, 그렇게, 우리 문학사에는 있었다. 시인의 감각과 안목과 인식과 미학이 없었다면 과연 '청록파'와 '미래파'가 그이름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 

  앞서서도 말했지만, 나는 평론가가 아니다. 나는 평론을 할 공인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 비평과 연구의 관점이 혼류되는 지점을 분간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좋은 평론에 대해서는 말할 것들이 있다. 좋은 평론은 좋지 않은 시가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아는 바를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좋은 시인은 좋은 평론이 지적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비판을 사랑한다. 좋은 평론가는 시인을 존중한다. 그의 작품을 사랑한다. 이상의 「오감도」연작은 신문에 작품 전체를 게재할 수 없었다. 성난 대중들 때문이다. 이태준은 사직서를 픔에 넣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연재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무지한 대중들 때문이다. 편견과 압력을 이겨낼 수 없었다. 우리는 지금 이상을 천재라고 부른다. 그는 요절하고 만다. 현실과 미래, 20세기와 21세기 사이에 낀 채 이상은 분열되고 파열되고 살해되었다(이상의 「오감도」연작을 둘러싼 문학사의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 참조. 장철환, <「오감도」에 대한 난해, 기타> 위의 책, 94~126면). 좋은 평론가가 할 몫이 여기에 있다. 이상을 알아보고, 이상의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파악하고, 연재라는 사건을 실행할 수 있는 것. 평론과 평론가가 시인을 선발하고 시인의 작품에 점수를 매기고 시집의 가치를 판단하는 현재의 질서를 부정해야 한다. 평론과 평론가는 시와 시인을 적대시하지 않아야 한다. 좋은 평론과 좋은 평론가는 좋은 시와 좋은 시인을 변별한다. 이론과 철학을 덮씌우기 전에, 시의 질서와 아름다움과 본질을 시 안에서 찾아낸다. 이론과 철학 없이도 문학은 가능하다. 좋은 시는 이론과 철학을 거부하지 않는다. 좋은 시인은 오히려 이론과 철학에서 자신의 시를 찾아낸다. 시는 이론과 철학 밑에 있지 않다. 시는 이론을 견인하고  철학과 대결한다. 김수영은 하이데거를 알았고, '실존'을 그의 시에 개진했지만, 김수영의 시가 하이데거의 실존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가 없어도, 그의 철학을 소거시켜도, 김수영의 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해 가능하다. 더불어 아름답고, 뛰어나다. 이론과 철학은 시 이해의 보조도구이다. 어디까지나 '보조'할 수 있을 뿐이다. 시를 철학에 굴종시키는 일을 부지불식간에 자행하는 평론들이 만연해 있다. 시인이 바디우와 랑시에르를 시에 초대했다. 평론가들이 '정치시'라는 이름으로 뒤따라왔다. 그 어떤 시인도 철학자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 어떤 시도 철학적 인식의 보조 도구가 될 수 없다. 몇몇 철학자들이 애호하는 김수영의 시가 철학 담론에 의해 절편(節片)이 되었던 과정을 우리는 목격했다. 김수영의 시적 인식이 철학의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김수영의 시가 뛰어난 수준을 획득했다는 전도가 횡행한다. 평론가들이 주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실패이다. 평론의 무능이다. 평론을 위해서 이론과 철학을 도려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최소의 철학과 최소의 이론을 작동시켜야 한다. 시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철학과 이론에 의해 보증될 수는 없다. 과격하게 말해서, 일반언어학(Liguistique generale) 이외의 '學'이 시의 이해에 필요한가.

  평론이 없다면 시는 존재할까. 존재할 것이다. 시가 없다면 평론이 있을 수 있을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시가 있어야 평론도 있다. 평론은 언제나 시에 후행한다. 시와 평론은 상호적이지만, 전제는 반드시 시이다. 좋은 시인은 좋은 시인을 알아본다. 김수영이 신동엽을 알아봤듯이, 좋은 평론가는 좋은 시인을 만나게 된다. 최동호와 조정권이 그러했듯이.

  술자리에서 우스갯소리를 할 때가 있다. 시인이 다수이고, 평론가가 소수일 때. 왁자한 웃음이 터질 때가 있다. 시인이 평론집을 비평하자. 시인이 평론집의 추천사를 쓰자. 시 창작에 실패하여 평론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대다수의 평론가들의 습작시를 문예지에 게재하자. 비평가들만을 대상으로 한 시인 등단 코너가 있어야 한다. 심지어 비평상 심사를 시인들이 하자…… 일동 박장대소. 낄낄 깔깔 흐흐…… 웃어넘기면 될 개그이지만, 생각해 볼 여지도 없지는 않다. 언제부터 평론이 시 위에 군림했는가. 그것이 당연한 것인가. 최근 들어 무시되었던 시의 위의를 스스로 찾아내고, 비평을 주도하고, 담론을 생산하고,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려는 시인들의 인식과 행동이 시도되고 있다. 나는 미래의 문학사를 감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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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표현』2016-7월호 <기획 특집 _ 쓰고 싶은 평론>에서

  * 장석원/ 2002년 《대한매일》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역진화의 시작』『리듬』, 평론집『지나간 미래, 사랑의 라멘트』외. 현 광운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