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생태주의/ 김성곤(金聖坤)

검지 정숙자 2016. 7. 7. 17:25

 

 

『문학사상』2016-7월호/ 연재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문예사조 15회

 

 

     생태주의

 

     김성곤(金聖坤)/ 한국문학번역원장, 서울대 명예교수

 

 

 

  1. 생태주의 등장의 배경과 의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초래한 포스트모던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환경생태계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고, '생태주의'라는 새로운 문예사조를 창출하게 해주었다. 생태주의는 인간의 이기적 사고방식과 제국주의적 생활양식이 자연과 인간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관점에서, 인간의 사고전환을 통한 생태계 보호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조다. 이때 생태계라 함은, 비단 자연생태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생태계도 포함한다.

  1972년 그레고리 베이츤은 『마음의 생태학 Steps to an Ecology of Mind』에서 인간의 비뚤어진 마음이 인간생태계 파괴의 주범이라고 보았다. 이 기념비적 저서에서 그는 히틀러의 타인종 학살을 문명생태계 파괴의 대표적인 예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편 1차 세계대전 후, 패전국 독일을 경제적 궁지로 몰아넣음으로써, 나치즘의 태동을 촉발시킨 베르사이유 조약 참가국 정상들 역시 생태계 파괴의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작가들의 인식은 그보다 더 빨랐다.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인 미국작가 토머스 핀천은 이미 1960년에 출간한 소설 『브이를 찾아서』에서 20세기 인간 생태계를 파괴한 두 주범으로 서구 제국주의와 제3세계 민족주의를 지목했다. 핀천에 의하면, 서구 제국주의는 수많은 제3세계 식민지인들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분 아래 일어난 제3세계 민족주의 또한 똑같은 오만과 독선으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1993년에는 에드워드 사이드도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서구 제국주의와 제3세계 민족주의는 서로를 좀먹어 들어가며 이용하는 똑같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이다."라고 지적했다. 비슷한 경우가, 극우 파시스트였던 히틀러의 인종청소나 극좌 공산주의자였던 스탈린의 집단학살, 또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무슬림 테러리스트들 사이의 대립과 반목에서도 발견된다. 양 극단의 횡포와 폐해는 결국 두 극단적 정치 / 종교 이데올로기가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작가 장 마르크 오베르는 『대나무』에서 동물적인 사회를 비판하고 식물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대나무 숲의 대나무들은 뿌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가 상처를 입으면 모든 대나무들이 고통을 느낀다. 즉 생태계는 모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하나를 파괴하면 마치 그물망처럼 전체가 망가진다는 것이다. 또 에코  페미니즘에 의하면, 여성은 대자연과도 같아서 여성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학대하고 상처 입히는 것은 곧 자연 생태계에 대한 파괴행위가 된다. 즉 한 명의 여자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는 이 세상 여성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것과도 같고, 궁극적으로는 대자연을 훼손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2.『채식주의자』에 나타난 생태주의 사상

  그런 면에서 보면, 최근 '맨 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한 한강의『채식주의자』역시 한 편의 훌륭한 생태주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채식주의자』3부작을 관통하는 주제는 '폭력'인에, 폭력은 곧 인간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과연 히틀러와 스탈린의 대학살과,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전쟁, 그리고 정치적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는 생태계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그 결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죽었고,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으며, 살아남은 자들의 삶 또한 비참하게 되었다.

  작가 한강은 인터뷰에서 "폭력적 환경에서 살고 있는 약자의 저항과,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성찰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과연 폭력 앞에 인간의 존엄성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채식을 원하는 딸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이는 아버지의 무차별 폭력 앞에, 그리고 싫다는 주인공에게 억지로 밥을 먹이는 병원 직원들의 폭력 앞에 인간의 존엄성은 무너진다. 지하철과 거리에서 잘못을 타이르는 어른에게 가하는 젊은이들의 폭력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다. 폭력의 피해자는 평생 그 치욕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도 『무기여 잘 있어라』에서 주인공 헨리 중위의 입을 빌려서 폭력의 극치인 전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신성한, 영광스러운, 희생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염증을 느꼈다. 전장에서 나는 아무것도 신성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영광이니, 명예니, 용기니, 신성이니 하는 추상적인 단어들은 다만 외설일 뿐이었다. 전쟁터에서 신성한 것은 없었고, 영광스럽다는 것에는 영광이 없었으며, 희생이란 고기를 먹지 않고 땅에 묻는다는 것만 다를 뿐, 마치 시카고의 도살장과도 같았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3부작 중, 제1부 <채식주의자>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사회의 폭력을 묘사하고 있다. 가부장적 체제에서 약자인 여자나 딸은 강자인 남자와 절대적인 힘을 갖는 아버지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당한다. 만일 여자나 딸이 그 권위주의에 도전하면, 그 순간 그들에게는 폭력이 가해지고, 극도의 수치감 속에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은 무너진다. 주인공 영혜의 아버지는 육식이 옳고 채식은 틀렸다는 확신에 사로잡혀서, 싫다는 딸의 입에 강제로 고기를 집어넣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원시인의 고집, 즉 무식한 자의 신념이라고 하는데, 영혜의 아버지는 그 전형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도 자신을 절대적 진리라고 믿고 남은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즉 이분법적 가치판단과 독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타인에게 자신의 정치이념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채식주의자>는 바로  그러한 독선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제2부 <몽고반점>은 일견, 미의 극치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구도소설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문신>을 연상시킨다. 주인공 영혜의 형부는 비디오 아티스트인데, 처제에게 성적 매력을 느껴 그녀의 몸과 자신의 몸에 꽃과 나무로 바디페인팅을 한 다음, 성적 관계를 갖는다. 이 작품은 내가 『문학사상』주간으로 있을 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는데, 그때 나는 심사평에서 "미의 극단적 추구는 때로 관습적인 도덕의 초월과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요구한다. 두 사람의 결합이 단순히 동물적인 것이 아니라, 식물적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작가는 섹스를 육체적 욕망을 초월한 심미적 기구(祈求)로 변모시킨다."라고 썼다. 아이 때 엉덩이에 나타났다가 성인이 되면 사라지는 몽고반점을 예술가가 추구하는 원초적 순수성의 상징으로, 그리고 이 작품을 그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소설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에 『채식주의자』3부작을 모두 읽으면서 나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또 다른 책읽기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몽고반점』이 사실은 예술과 탐미적 추구라는 가면을 쓴 교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미묘한 폭력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자살 시도 후에 감정이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영혜를 형부는 관능적 대상으로 보고 자신의 성적욕구를 채우는 데 이용하기 때문이다. 영혜는 형부와의 섹스를 자연과의 합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형부는 바디페인팅으로 처제를 속여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불태운다. 그렇다면 형부는 사이비 예술가이자,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사기꾼con-artist들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3부 <나무불꽃>은 얼핏 보면 옳은 것처럼 보이는 '대의grand cause'를 내세운 제도적 폭력을 비판하고 있다. 예컨대 질서를 위해서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대의, 또는 민주화를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이 필연적이라는 그럴듯한 대의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사실은 선의로 포장된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의 <정의의 사람들>은, 독재자 대공을 암살하러 갔으나, 대공의 품에 어린아이가 있는 것을 보고 차마 총을 쏘지 못하고 돌아온 암살자가 조직으로부터 비난받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물론 까뮈는 독재자 제거라는 명분하에 무고한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문학은 바로 그런 면에서 마키아벨리식 정치와는 궤적을 달리한다.

  <나무불꽃>에서 영혜는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하게 된다. 자신을 식물이자 나무라고 생각하는 영혜는 식사를 거부하고 물만 마시려 한다. 그러자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대의명분 하에 병원 직원들은 영혜에게 강제로 밥을 먹인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 또한 당의정을 입힌 폭력이라고 본다. 환자가 원하는 것이나 상대방의 존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거기에 따라 환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도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많다. 또 우리의 관습과 제도  중에도 약자에게 불리한 폭력적인 것들이 많다. 예컨대 여자들과 아이들이 감수해야만 하는 언어적 및 신체적 폭력도 있고, 지연, 학연, 혈연으로 인해 닫힌 문 밖에 서서 좌절하는 외부인들에 대한 제도적 폭력도 있을 것이다.

  한강의 또 다른 소설 『소년이 온다』는 시민에 대한 정부의 폭력과 공권력의 폭력을 다루고 있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진압군으로 표상되는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을 은유적으로 그러나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은, 광주 민주화항쟁 때 죽은 소년과 소녀들은 더 이상 자라지 않은 채, 그때 그 모습으로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 남겨놓고 간 가슴 아픈 기억을 일깨운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채식주의자』의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를 배출한 영국 런던의 SOAS에서 발간한 책자에는,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폭력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고 쓰여있다. 과연 타자를 배척하고 자신만 옳다고 믿는 우리 사회의 극좌와 극우의 대립, 또는 이슬람을 테러리스트 집단으로만 보는 기독교 원리주의자들과 서구를 타락한 적으로만 생각하는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의 반목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해가 얼마나 절실하고 중요한가를 깨우쳐주는 좋은 경우다.

 

 

  3.『미국의 송어낚시』와 생태주의 인식

  미국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1961년에 썼지만 출판사들에 의해 출간을 거절당하다가, 선배작가 커트 보네것의 도움으로 1967년에야 출간된 『미국의 송어낚시』는 대표적인 생태소설이라는 평을 받는다. 미니멀리즘 기법을 차용한 이 소설의 화자는 현대에 와서 사라진 목가적 꿈의 상징인 하천을 찾아 미국의 서부를 방황하는 사람이다. 브라우티건이 보는 현대는 19세기 미국인들이 추적했고 미국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거대한 흰 고래 '모비 딕'이 사라진, 또는 조그만 송어로 축소된 사회다. 천명관도 소설『고래』에서 현대를 거대하고 우아한 고래나 코끼리가 사라진 시대, 그리고  대규모 서커스가 미니 사이즈 USB 속에 엔터테인먼트로 축소된 시대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미국의 송어낚시』의 화자는 잃어버린 하천을 되찾아 다시 한 번 송어가 뛰노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송어가 살 수 있는 하천마저 말라버린 삭막하고 황폐한 현대의 풍경이다. 멀리 하천 같은 것이 보여서 달려가 봐도, 막상 도착해보면 흐르는 하천이 아니라 집으로 들어가는 시멘트 계단이어서 화자는 실망하고 좌절한다. 광야의 모험과 유연한 하천의 상상력이 현대에는 안정된 집으로 정착해 들어가는 경직된되 계단으로 바꾸어진 것이다.

  과연 현대의 메마른 황무지에는 송아가 뛰어놀던 맑은 하천은 사라지고, 중금속에 오염된, 그래서 배를 뒤집은 채 죽어있는 송어들만 떠 있는 더러운 하천으로 남아있다. 그 죽은 하천을 다시금 송어가 파닥이는 하천으로 만들기 위해 『미국의 송어낚시』의 주인공은 죽은 송어들을 향해 필사적인 심정으로 사정(射精)을 한다. 물론 그건 재상과 풍요를 기구하는 상징적인 행위지만, 한 번 파괴된 하천은 이미 돌이킬 수도, 다시 되살아날 수도 없다.

  『미국의 송어낚시』의 화자가 보는 현실은 동물적인 폭력사회다. 빨간 옷을 입은 애인에 의해 배신당하고 FBI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은행 강도 존 딜린저 에피소드는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양떼로 상징되는 민중이 독재자의 상징인 목동의 조종과 폭력에 순응하는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이 소설은 공권력의 폭력이 인간 생태계를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심지어 식물들조차도 폭력적이고 위협적이다. '코브라 릴리' 챕터에서 저자는 매혹적이지만 치명적인, 마치 동물 같은 식물을 보여주며 현대의 폭력 사회를 비판한다. 코브라 릴리는 곤충을 잡아먹고 사는 육식 식물인데, 오늘날에는 식물조차도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송어낚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과도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미국의 송어낚시』의 화자는 오늘날 현실세계가 목가적인 꿈을 상실하고, 돈과 기계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망하는 현대인이다. 작품의 마지막에 화자는 하천이 폐차장이 되었고, 거기서 하천을 피트당 잘라서 팔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미국의 송어낚시』의 화자가 보는 현대는 물질과 기계가 지배하는 곳, 그래서 환경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된 곳이다. 그래서 그는 자연과 하천의 생태계가 파괴되어 송어가 사라진, 목가적 꿈을 상실한 현대의 메마르고 황량한 풍경을 슬퍼한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바로 그러한 발견과 깨달음을 안겨주는 뛰어난 생태소설이다.

 

 

  4.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와 생태주의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원제: 잔디밭의 복수)』는 브라우티건이 발표한 또 하나의 뛰어난 생태소설이다. 캘리포니아는 원래 햇빛과 대자연과 꿈의 장소였다. 1948년 골드러시 때, 동부인들은 황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갔고, 일확천금의 꿈을 찾아 서부로 갔던 그들을 '포티 나이너스 Forty-niners'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부개척시대가 끝나자 캘리포니아에도 낭만적 꿈과 목가적 풍광이 사라지고, 특히 LA는 각지에서 몰려든 자동차로 인한 스모그의 도시가 되었다. 즉 인간의 따뜻한 접촉이 결여되고 돈과 기계가 지배하는 사회, 즉 인간생태계가 파괴된 장소가 된 것이다. <크래쉬>라는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한국계 여자의 차가 뒤를 들이받은 차 속에서 흑인 형사가 내뱉는 시니컬한 독백도 LA의 그러한 상황을 은유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 "LA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접촉할 기회가 없다. 언제나 금속의 차 속에 갇혀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사람의 체취가 그리워서 서로 충돌하고 상처 주는지도 모른다."

  과연 저자는『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에서 독일의 폴란드 침공, 뉴잉글랜드의 마녀사냥, 그리고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소재로 해서 어떻게 캘리포니아뿐 아니라, 전 세계와 인간의 마음에서 녹색의 잔디밭과 정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신 자동차와 기계가 들어섰으며, 그 결과 심각하게 자연환경과 인간의 정신생태계가 파괴되었는가를 조명하고 성찰한다. 이 소설에서 캘리포니아는 꽃이 사라지고, 벌들은 꿀 대신 동물의 간을 먹는 동물적 폭력사회로 제시된다. 저자는, 생태계가 파괴된 황폐하고 피폐한 곳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은 지금 자기가 버린 '잔디밭의 복수'를 당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영화 <레인맨>하고도 상통한다. <레인맨>처럼 이 소설도 우리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목가적 꿈을 되찾고, 망가진 인간 정신 생태계를 치유하며, 사라진 잔디밭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은 단순히 돈이나 기계를 버리고  전원주의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이 소설의 화자는 시를 좋아해서 수도관을 영국시인 존 던으로, 욕조를 셰익스피어로, 그리고 부엌 싱크대를 미국시인 에밀리 디킨슨으로 교체한다. 그러나 그는 곧 문인들이 하수관이나 욕조나 싱크대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다시 예전으로 복원하려고 해보지만, 이번에는 작가들이 나가기를 거부한다. 그러한 에피소드를 통해, 저자는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적 선택이나 사고방식은 위험하고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시사한다. 즉 양 극단을 다 비판하면서도 포용하는 중용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5. 토머스 핀천의 『브이를 찾아서』에 나타난 정신생태계의 파괴

  시대를 앞서간 또 또 다른 미국작가 토머스 핀천도 1960년에 이미 생태 소설로 뷴류될 수 있는 소설 『브이를 찾아서』를 발표해서 주목을 끌었다. 핀천은 이 기념비적 소설에서 20세기 인간의 정신 생태계를 파괴한 요인으로 서구 제국주의와 제3세계 민족주의, 우파와 좌파, 그리고  산업자본주의와 마르크시즘의 대립을 내세웠다. 위 소설에서 핀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20세기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두 개의 시각으로만 사물을 보았다. 우파와 좌파, 또는 온실과 거리가 그것이다. 우파는 과거의 온실에만 머물러 있었고, 좌파는 거리에서 군중들을 조종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 그 결과, 그 둘은 모두 미래를 향한 꿈속에서 살지 못했다.

 

  핀천은 또 『브이를 찾아서』에서, 윤리가 사라지고 인간 생태계가 파괴된 상황에서는 기계와 돈이 인간을 지배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기계가 되거나 인공물이 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보다 더 우월한 기계인 컴퓨터나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코넬대 공대를 다녔고 보잉사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한 적도 있는 핀천은 이미 60년대에 테크놀로지와 인간 정신생태계의 관계를 성찰하고, 암울한 미래를 예시하는 놀라운 혜안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소설인 『제49호 품목의 경매』(1966)에서 핀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의 흑백논리가 아니라, '이것도 그리고 저것도'의 중용의 길을 가야 하며, 0과 1 사이에 있는 제3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마르크시즘과 산업자본주의는 둘 다 엄습해오는 공포일 뿐이다.

 

  세 번째 소설인 『중력의 무지개』에서 핀천은 인간 생태계를 교란하고 파괴하는 서구사회의 테크놀로지 맹신과 오용을 경계하며, 모든 것이 합리적,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서구의 이성중심주의도 비판한다. 예정설을 주장했던 미국 청교도주의의 독선과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핀천은 주인공에게 단색이 아닌 다양한 색의 옷을 입힌다. 그는 각기 다른 일곱  가지 색이 모여 하나의 조화된 무지개를 이룬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인간의 독선과 테크놀로지의 오용으로 파괴된 생태계의 치유와 회복 방법으로 다문화주의와 다인종주의를 제시한다.

 

 

  6. 파괴된 생태계의 복원을 위해

  최근에 출간된 다른 소설들도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생태주의를 성찰하고 있다. 예컨대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은  자기만 옳다고 믿는 인간의 독선과 인종적 편견이 초래한 정신생태계의 파괴를 다루고 있고, 마이클 크라이튼의 『넥스트』는 인간과 동물의 유전인자를 배합함으로써 일어나는 생태계의 교란문제를 탐색하고 있으며,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는 과학자의 독선과 테크놀로지의 남용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다루고 있다.

  영화 <아바타>도 뛰어난 생태주의 작품이다. 나비족이 살고 있는 판도라 행성은 인간들이 돈과 테크놀로지와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파괴하려는 전원(田園)이자,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목가적 꿈의 장소이다. 나비족 아바타가 된 주인공은 그곳에서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자원을 얻는다는 명분 아래 생태계 파괴를 시도하는 지구인들의 파괴와 폭력에 맞서 목가적인 꿈의 상징인 판도라 행성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에게 가해지는 여러가지 폭력도 궁극적으로는 자연생태계의 교란과 정신생태계의 파괴를 불러온다고 볼 수 있다. 영혜는 자신만 옳다는 독선이 초래하는 폭력, 교묘한 사기성 폭력, 그리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합리화시키는 제도적 폭력의 피해자로 제시된다. 『채식주의자』는 소수자에 대한 다수의 횡포, 약자에 대한 강자의 횡포, 그리고 여자에 대한 남자의 횡포를 설득력 있게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생태주의 소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양한 소재를 통해 이 시대의 문제점을 고민하고 생태계 파괴의 위험성을 경고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폭력을 통해 생태계 파괴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고발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생태주의는 인류의 절멸을 막고 인류문명의 보존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성찰하게 하는 이 시대의 파수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