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김경진(1937~2013, 76세)
대쪽 같아
곧기만 하던 분
마디가 많아 걸림돌이 많으시고
댓잎처럼 손이 베일 것 같던
어머니 간경화로 사경을 헤매던 날
"얘야 내가 말할 수 있을 때
동생 좀 데려 오렴"
몇 날 밤을 머리맡에 붙어있던 우리는
깜짝, 어머니 깨어나시자 회생하셨다고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은 피아노에 붙어 있었다
오전이면 두 시간 남짓 피아노를 치는 동생
아이 키우듯 정성을 들인다
조바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는 동생은
두 시간을 채우고 일어났다
우리가 도착하니 어머니의 몸에서
온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시던 그 눈빛은
바람이 되어 대숲을 흔들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전문-
장난감 사오면서
김경진
"할머니 장난감 사서 미안해요"
싸늘한 바람이 옷깃 속으로 들어온다
아직 유치원생인 필립이는
공룡이나 악어를 좋아해
종이만 보면 그것들을 그린다
티라노사우르스 오비랍토 디메트로논……
"필립아 업어줄게"
"할머니 이제 다 컸는데 왜 업어
내가 할머니 업어야지"
"아니 네가 더 크면 힘들어서
못 업으니까 지금 업어주려고"
"그럼 내가 더 크면 할머니 업어줄게"
내 어깨를 주물러주는
고 작은 꼬막손으로
어둠이 우리를 솜이불처럼 감싼다
"머리 할머니 등에 꼭 기대"
"응, 할머니 힘들지?"
"아니 네가 예쁘니까 힘 안 들어"
가로등이 하나 둘 할머니와 손자 가슴에서 켜지고
불빛에서 빛나는 할머니와 손자의 그림자.
-전문-
쓸쓸한 날
김경진
"세상에서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며
내 치맛자락 붙잡던 손주놈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에 오지 마"
새벽에 자다 깨어서
"아직도 안 갔어? 빨리 가란 말이야" 한다
아무리 손주놈이지만 마음이 서운하다
"아들 집에 살았더라면" 생각하다가
내 할머니의 설운 생애가 떠올랐다
아들 오 형제에게 재산 분배하시고
부초처럼 이 아들 저 아들 집에 드나드시며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도시던
찬밤 같던 할머니.
어느덧 그 아니에 접어든 겨울 창가
슬픔이 어에처럼 번지는 눈물 같다
갓 다섯 살 된 손주놈의 변덕스러움에
내 마음이 흐렸다 개었다 한다.
-전문-
표4> : 김경진 시인의 시는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실존과 성찰의 모습들이 그것이다. 실존을 확인하는 시편에서는 어린 날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서 보내기도 한 시인의 삶과 상처가 시의 배경이 되고 제재가 된다. 그런 그의 시는 6.25를 전후로 한 우리 민족사와 맞물린 가족사의 비극에서 잉태되는 경우도 많다. 이후 자신의 편치 않은 생의 이력 또한 그의 시가 되기도 하고, 마침내 자식과 손주들과의 행복한 일상까지 시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처럼 김경진 시인의 시의 시간과 공간은 멀리 유년기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넓고도 깊다. 한편 그의 또다른 시의 모습은 생의 형식을 묻는 성찰의 자세를 보여주는 시편들이다. 이는 삶을 함부로 살아내지 않겠다는 김경진 시인의 삶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경호/ 시인, 문학평론가, 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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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오래된 시간』에서/ 2005.11.10. <도서출판 시와사람> 펴냄
* 김경진/ 전남 광주 출생(1937-2013), 2009년『서정과 상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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