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평론]김유석_허무, 우리, 그리고 사랑(발췌)/ 귄터빵집을 나온 혜화동: 강은교

검지 정숙자 2015. 12. 9. 02:16

 

 

 

『예술가』2015-겨울호 <구상문학상특집>[평론]허무, 우리, 그리고 사랑/ 강은교의 시세계(발췌)

 

 

    귄터빵집을 나온 혜화동

   -어느 황혼을 위하여

 

     강은교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얌전히 고개 숙이고 있는 곳, 황혼이 유

난히 아름다운 곳, 늦은 오후면 햇살 비스듬히 비추며 사람들은 거기서 두

런두런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내다본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황금빛 햇살이 걷는 것을, 그러다

듣는다, 슬며시 고개 들이미는 저물녘 바람소리를

 

  오래된 플라타너스 한 그루 그 앞에 서 있다, 이파리들이 황혼 속에서 익

어간다, 이파리들은 하늘에 거대한 정원을 세운다,

  아주 천천히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실뿌리들은 저녁잠들을 향하여 가는

발들을 뻗고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거대한 추억들 곁에 함초롬히 서 있는 곳

  허기진 너는 흠집투성이 계단을 올라간다

  이파리들이 꿈꾸기 시작한다

                       -시집『바리연가집』( 2014)

 

 

  평론_발췌】혜화동의 '귄터빵집'은 "황혼이 유난히 아름다운 곳"이고 늦은 오후에 '두런두런 사랑을 이야기"하는 곳이다. "황혼"을 인생 후반기의 상징으로 읽는다면 이때에 사랑의 추억은 황금빛으로 더욱 찬란하고 아름다워진다. 귄터빵집은 기억 속에서 망각으로 인해 죽어가는 자를 찾을 수 있는, 바리가 죽어가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약수를 찾으러 떠난 서천서역과 다르지 않다.

  '귄터빵집'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은 일종의 감정 상태인 기억이 그 지속을 위해 준거점으로 삼는 특정 장소다. 그 특수성이 역설적으로 보편성을 띠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각자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으로 되살려 꿈꾸기 시작할 때 나 혹은 그곳을 공유하는 이들의 특정한 장소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김유석/ 문학펑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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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은교/ 1945년 함남 흥원 출생, 1968년 『사상계』로 등단

  * 김유석/ 2014년 《중앙일보》를 통해 평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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