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도로, 빙하기/ 김영

검지 정숙자 2015. 9. 19. 22:39

 

 

    도로, 빙하기

 

     김영

 

 

   쑥, 마늘을 먹던 곰은 동굴을 벗어났다. 날카롭던 발톱은 흔적만 남

고 온몸을 덮었던 터럭도 두어 곳으로 정돈되었다. 목소리를 또박또박

분절하는 법도 터득했다. 두 발로 직립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배웠다.

 

  눅눅한 동굴이 아닌 높고 건조한 빌딩에서 그들은 살았다. 입체를 버

리고 평면에 익숙해졌다. 무표정을 달콤한 것이나 싱싱한 것과 바꿨다.

마늘과 쑥만 먹는 것은 마술이 아니었으나 지폐를 모으는 것은 마술이

었다.

 

  빌딩의 사각은 아가리가 컴컴했다. 동굴 같은 어둠이 싫어 태양을 숭

배했으나, 태양이 뜨지 않는 날들도 있었다. 거기서는 몸을 둥글게 말

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마음에 동굴이 파이기 시작했다.

 

  무표정의 지폐로 꿀과 비릿한 새싹, 파닥거리는 연어, 푹신한 의자

와 바꾸었다. 생의 가장자리만이 부드럽고 풋풋했다.

 

  사각 아가리에는 사각 문턱이 있었다. 몇십 년 간 그 문턱이 닳는다

고 생각했으나 문턱에게 흔적만 남은 발톱을, 분절을 빼앗겼다. 목소

리는 무엇을 말해도 신음이었다. 등이 굽고 고개를 떨구는 날이 많아

지자 몸이 다시 동그랗게 말렸다. 두 발로 걷는 날들이 줄었고 터럭은

심장까지 번졌다.

 

  다시 곰, 곰이 되었다. 문턱에 걸린 그들이 다시 곰이 되었다는 뉴스

가 한창이다. 눅눅한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사는 곰들이 있다고,

조금만 더 견디면 아예 문턱이 사라질 것이라는 소문도 나돈다고.

 

 

  <※원제: '다시 곰'을 '도로, 빙하기'로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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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청춘』2015-가을호 <문학청춘의 시와 시인>에서

 * 김 영/ 전북 김제 출생, 1995년『자유문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