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손택수: 시집 채석강/ 작품론_ 김영범: 풍진세계(風塵世界), 바람과 먼지같이(발췌)

검지 정숙자 2015. 9. 18. 23:13

 

 

 『시인동네』2015-가을호 <탐구> 손택수/ 작품론_ 김영범: 풍진세계(風塵世界), 바람과 먼지같이(발췌)

 

 

 

    시집 채석강

 

    손택수

 

 

  출판쟁이가 보면은 영락없이 반품되어 온 책들이다

  서점 매대엔 아예 처음부터 꽂혀보지도 못하고

  비좁은 창고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그래도 오기는 있어서

  폐지 공장엔 결단코 보낼 수 없는

  내가 잘 아는 어느 시인의 시집들이다

  빚을 지고 쌓아올린 처녀시집

  저 중에 한 권을 빼서 읽으면

  수천 권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겠지

  나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나무들의 희생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

  종이 값도 나오지 않는 시를 붙들고 바다로 간 시인아

  세상에 깔리지 못한 시집이 층층 절벽을 이루었다

  지워지면서, 지워지면서 돋는 무늬가 되었다

  저 절벽을 읽는 건 이제 바다의 일이다

  뜨고 지는 해와 달의 일이다

  만 권의 책을 읽고도 더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바람 부는 변산에 가보라

  서점 같은 데선 결단코 찾을 수 없는 시집 채석강

                                                 -전문-        

  

 

  「시집 채석강」에서 주체는 시집이 팔리지 않는 시대를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종이 값도 나오지 않는 시"이지만 고집스레 시작(詩作)을 엄추지 않는 시인들. 시에 담긴 정신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서점에 "깔리지 못한 시집"들과 초라한 판매량만으로도 그들의 작업은 시가 시대와 불화하고 있음을 증빙한다고 말하면 과할까. 혹여 반복해서 시를 쓰는 일이 강박적 충동이라면, 이는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은 중단 없이 살아 있음을 선언하는 자기 확인이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로이 시작(始作)하는 모든 시들은 그리고 삶들은 "지워지면서 돋는 무늬"를 그려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물과 감성을 교환하던 생(生)들. 그것은 수만 권의 책과 시집으로도 다 포착할 수 없는, 바람과 먼지 같은 순간들이겠지만 제 빛을 내뿜는다. 하여 '채석강'의 풍경은 사물을 인간의 지위까지 올려서 겹쳐 쌓아야 비로소 보이는 세계의 참모습이다. (김영범/문학평론가)

 

 

  * 김영범: 1975년 경남 밀양 출생, 2013년 『실천문학』으로 평론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