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문혜원_ 공동체로 소환되는 시인들(발췌)/ 손미: 앙파 공동체

검지 정숙자 2015. 9. 19. 00:22

 

 

『시인동네』2015-가을호「징후와 전망/ 당대의 언어, 당대의 서정」/ 문혜원: 공동체로 소환되는 시인들(발췌)

 

 

   양파 공동체

 

    손미

 

 

  그러니 이제 열쇠를 다오. 조금만 견디면 그곳에 도착한다. 마중 나

오는 싹을 얇게 저며 얼굴에 쌓고, 그 아래 열쇠를 숨겨 두길 바란다.

  부화하는 열쇠에게 비밀을 말하는 건 올바른가?

 

  이제 들여보내 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

고 기도했다.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

을 지나면 시냇물. 굴러떨어진 양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

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는 앙파를.

 

  문 열면 무수한 미로들.

  오랫동안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때때로 쪼개고 열어 흰 방에 내리는 조용한 비를 지켜보았

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추는 건 올바른가. 꽉꽉 찬 보따리를 양손

에 쥐고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내 집.

 

  작아지는 양파를 발로 차며 속으로, 속으로만 가는 것은 올바른

가.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은 올바른가.

                                                     -전문-

 

 

  경계에서 서성거리는 손미의 시는 현실로부터 발부된 소환장을 손에 쥐고 망설이는 1인칭 주체의 독백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마트로시카 인형이나 양파처럼 겹겹이다. 그러나 그 겹은 미래파 시에 나타나는 다성성이나 혼종성과는 상반된, 단일한 주체의 집중된 내면의 결을 말한다. 이제 양파는 거의 다 익어 투명해지고 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한다. 집의 문을 열고 미로로 들어갈 것인가 돌아서서 마을을 향한 길로 나설 것인가.

 

 

  * 문혜원/ 제주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89년『문학사상』평론 등단. 저서『한국 현대시와 모더니즘』『한국근대현대시론사』『비평, 문화의 스펙트럼』등이 있음. 아주대학교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