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골목의 이유/ 유정이

검지 정숙자 2015. 9. 12. 13:04

 

 

    골목의 이유

 

     유정이

 

 

  그는 진정 후회하는 감정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처음부터 절단된 골목을 집어 올렸던 거지

  기호에 따라 나눌 때

  우리가 가진 건

  울음의 일부

  설움의 외부라고 해도 좋다

  아버지의 머리칼이 뜯겨 나올 때마다

  울음의 가치는 놀랄 만큼 증대되었다

 

  나는 왜 아직도 구태의연한 의자처럼

  아버지를 말하는 거지 이렇게 계속 살아남아

  파충류처럼 뒷다리 접는 자세를 연습한다면

  유사시에는 어떤 경계도 펄쩍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영토가 새로울 것인가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은

  이생을 모두 건너야 가능한 일이다

 

  아침은 날마다 새롭게 재편되었으나

  저녁의 방향으로 어깨를 기울이는 골목은

  등(燈)을 놓치고 빛을 놓친

  빛을 놓친 후 등을 놓친 가로등처럼 조용하다

  나는 아직 골목에 있으며

  아버지와 내가 굳이 소비한 감정은 치외법권의 일,

  여기를 벗어나려면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다만 일고 있을 뿐이다

 

 

    *『문예바다』2015-가을호 <신작 시>에서

    * 유정이/ 1993년『현대시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