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백야일지/ 김명서

검지 정숙자 2015. 9. 1. 12:06

 

 

      백야일지

 

       김명서

 

 

  하루 종일 잘못 걸려온 전화조차 없다

  배출구를 찾아서

  본드를 마시거나 야동을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싸구려 쾌락이 시간을 채운다

  금세 쾌락은 휘발되고 침묵이 공상을 향해 치닫는다

  평소에 공상을 은닉하는

  랭보와 릴케와 니체를 헌 책방에 팔아넘기고

  수상학을 샀다

  저작자 아리스터텔레스에게 내 앞길을 캐묻는다

  손금은 과거를 기록하고 현재를 나타내며 미래를 예시하는 것이라 한다

  오른손을 펴고 들여다본다

  성공선이 잔금에 막혀 있고

  재물선 가운뎃부분이 끊겨 있다

  생명선과 두되선은 건조기후에 둘러싸여 있다

  직업을 가질 수도 자수성가할 수도 없는,

  내 운이 딱 그만큼이란 걸 알면서도 혹시 운이 바뀔 경우를 생각해서

  잔금은 수세미로 문질러 없애고

  끊어진 선은 창칼로 파서 이어주고

  때마침 함박눈이 내린다

  집 나간 고양이가 돌아와

  외알박이 눈을 꺼냈다 다시 알람시계에 끼워 넣고

  오 분에 한 번씩 시보를 알린다

  그때마다 태엽에 감긴 어두운 단어들이 분해된다

  늦잠꾸러기, 불운, 게으름, 실패, 우울, 좌절, 이별……

 

 

   *『유심』2015-9월호 <유심시단>에서

   * 김명서/ 2002년『시사사』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