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흑판/ 정재학

검지 정숙자 2015. 8. 28. 00:00

 

 

      흑판

 

     정재학

 

 

수업 중 판서를 하다가 갑자기 뭔가 물컹하더니 손이 칠판 속으로 들

어가 버렸다. 몸의 절반이 들어갔을 때 "선생님! 새가 유리창에 부딪쳐

떨어졌어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고 싶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물에 빠지듯 흑판에 빨려 들어갔다. 칠판 속으로 들

어가니 건너편 교실에서 중학교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

였다. 나는 짝과 떠들다가 생물 선생님에게 걸려서 철 필통으로 뺨을

맞았다. 맞을 때마다 샤프가 흔들려 덜그럭거렸다. 아이들이 웃었다.

뺨보다 그 쇳소리가 더 아파왔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 교문 밖의 고양

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종속과목강문계!"를 외치는 소리

를 들으며 다시 칠판을 건너오자 교실에 아이들은 없고 유리창 여기

저기 검붉은 핏자국만 가득하다.

 

 

  *『시사사』2015. 3-4월호 <시사사 초대석>에서

  * 정재학/ 1996년『작가세계』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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