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월평-시, 신진숙/ 천국 2 : 안미옥

검지 정숙자 2015. 8. 22. 08:43

 

 

  *『유심』2015-5월호 <월평-詩/ 느낌의 공통세계 : 신진숙>

 

 

      천국 2

 

      안미옥

 

 

  울음이 이마를 밀어낸다. 공원은 차가워졌다.

  납작한 배가 물속을 지나가듯 신발들이 지나간다.

  고요 밑엔 더 큰 고요가 있다고 믿었다.

  믿기 위해선 믿을 힘이 필요했다.

  나는 뒤집힌 채로 앉아 있다.

 

  평안이나 안식처럼 멀리에 있는 단어들을 우물거렸다.

  믿기 위해서 믿을 힘을 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나는 다시 편지를 쓰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편지들을 모아 놓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내게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보내온 답장들이 수북했다.

  모두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답장이 늦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것 말고는 없었다.

 

  수십 통의 편지들: 읽어볼 수 없는 문장.

  의자가 되지 않으려고 버티는 발끝.

  아무런 맥락 없이 뜯어지는 왼팔과 오른팔.

  흔들리지 않는 것은 더 크게 슬픈 일이다.

  무너지려고 벽은 몸을 비튼다.

 

  겨울에도 녹지 않는 얼음과 같이,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는 사람의 그림자와 같이,

  제 몸의 악취를 맡지 못하는 개의 후각과 같이,

  문 닫은 기차역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면서.

 

  그러면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되었다

                                               -『POSTION』2015, 봄호-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슬픔의 감정일 것이다. 고전적 의미에서, 슬픔은 즉각적으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힘이라고 여겨진다. 강력한 비유를 동반하는 경우, 슬픔은 현실 자체를 통합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그럴 때 슬픔은, 이곳과 저곳의 차이를 없앨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공통의 슬픔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강력한 동인이 될 수 있다. 재난 속에서 만들어지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입의 가능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의심스러운 것으로 다가온다. 즉, 하나의 일체감이란 상상된 것이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슬픔을 끌어당기고 있던 느낌의 중력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절대자를 상상할 수 없는 현대의 시인들에게 더욱더 그러하다. 이제 슬픔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시인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세계 자체와 화해 불가능한 형식으로만 주어진다. 안미옥 시인의 <천국 2>에서처럼, 슬픔이 통일성과 정반대의 극단들과 결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테면 슬픔은 동화가 아닌 아이러니를 선택한다.

  가령 슬픔의 아이러니는 이렇게 구성된다. "고요 밑엔 더 큰 고요가 있다고 믿었다."라는 말 뒤에 "믿기 위해선 믿을 만한 힘이 필요했다."는 고백이 뒤따르는 식이다. 슬픔이 주는 깨달음은 말해지는 동시에 부정된다. "평안이나 안식처럼 멀리에 있는 단어들을 우물거렸다."라는 말은 "믿기 위해선 믿을 만한 힘을 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의해 부정된다. "수십 통의 편지들"이라는 말과 함께 "읽어볼 수 없는 문장"이라는 모순이 뒤따르는 이유이다. 그것은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기다릴 수 없는 희망 없는 삶 속에서 시인은 정반대의 것들을 꿈꾼다. "문 닫은 기차역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이상하고 기이한 일들이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의 삶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된다. 슬픔도 다시 처음부터 반복된다. 이 반복을 통해 시인은 슬픔을 타자화하고 그 속에서 슬픔의 본질을 만나도록 우리를 이끌어간다.  

 

 

  *『유심』2015-5월호 <월평-詩/ 느낌의 공통세계 : 신진숙>에서 발췌 

  * 신진숙/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으로 등단.  평론집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 현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