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개미/ 박남희

검지 정숙자 2015. 8. 22. 01:55

 

 

      개미

 

     박남희

 

 

  풀잎 위에 개미 한 마리가 기어다닌다

  가늘고 긴 발가락으로 잠시 꼬물거리다가

  무엇엔가 골똘해 있다

 

  나는 문득 풀잎이 되어본다

  몸이 간질간질하다

  개미가 내 몸에 발가락으로 써대는 글은 무얼까

 

  개미는 자신이 걸어온 단단한 길을 버리고

  풀잎 위에서 새로운 길을 연다

  개미는 풀잎 위에 자서전을 쓰듯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가는 발을 꼬물거린다

 

  훅, 한 차례 바람이 지나간다

  풀잎을 따라 개미가 흔들린다

  개미의 자서전이 그동안의 단조로움을 떨치고

  바람과 함께 이리저리 흔들린다

 

  개미의 자서전이 내 감각 속에서 점점 선명해진다

  자서전 속의 내가 보인다

  내가 누군가의 풀잎이 되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문학청춘』2015-봄호 <문학청춘의 시와 시인>에서

   *  박남희/ 1966년 경기 고양 출생, 1996년《경인일보》, 1997년《서울신문》신춘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