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폭이 좁고 옆으로 긴 형식/ 김지녀

검지 정숙자 2015. 8. 15. 16:31

 

 

  『유심』2015-4월호 <유심이 주목하는 젊은 시인 : 김지녀/ 신작특집> 에서

 

 

 

      폭이 좁고 옆으로 긴 형식

  

       김지녀

 

 

  망설이는 것만으로

  우리는 옆이 길어집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옆이 전개될 때

  우리는 예상치 못한 점선들로 분할되곤 했습니다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어요 약속했던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그녀에게

  전화를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우산 아래서 옆이 다 젖도록 어둠이 길어져 있었습니다

  먼 곳을 헤매고 있는 사람처럼 옆의 옆이 낯설어졌어요

  자를 대고 칼로 긋듯 그날을 반듯하게 자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 잘 접혔을 겁니다

 

  한 번은 옆을 빌려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거절했고

  다른 한 사람은 발등을 바라보며 망설이더군요

  옆과 옆 사이의 어깨가 그 어떤 테두리보다 넓어서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더 넓고 따뜻한 옆을 차지하기 위해 우리는 분주했습니다

  옆에 얼마나 크고 넓은 폭포가 있는지

  절벽과 진창이 있는지

  가닿지 못하고

  우리의 옆은 배경이 없는 화면처럼 점차 장편이 되어갔습니다

 

  오후처럼요, 이웃의 그림자가 다음 페이지를 위해 발걸음을 재촉할 때도

  바닥에 남겨진 흙자국들을 지우며

  우리는 옆이 모르는 비밀 하나쯤은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우리는 옆이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좀 더 많은 내용을 담은 것처럼 우리의 옆에 정원과 연못을 가꾸고 있습니다

  비겁함을 쉽게 접기 위함입니다

  지나간 사건들을 돌돌 말아 놓고 오래 살기 위함입니다

 

 

  김지녀/ 2007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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