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병과 식초병
-無爲集 1
정숙자
나에게는 요즘 새로운 손짭손 하나가 생겼다
신문이나 전단 등에서 하루살이로는 아까운 그림을 솎아
엽서로 만드는 일이다
반듯하게 마름질한 아트지에 풍경들을 앉혀놓으면 웬만
한 시보다 따뜻하다
맑아지는 하늘이 세상 밖이다
그 살붙이들 곁에 두는 시간이 길어지지만 어쩌다 남풍이
불면 선뜻 띄워보내기도 한다
엊그제 태어난 엽서 가운데 간장병과 식초병 사진이 있다
자그마한 유리병 두 개가 어찌나 다정하게 서 있는지 대
할 때마다 저절로 행복해진다
나는 그들이 언제까지나 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다른 식탁으로 나뉘는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
세월과 함께 색이 바래고 흠집이 생기더라도 오늘 이대
로 한자리에 서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소화기관과 두뇌를 갖지 않은 몸일지라도 어울리
는 짝을 이루었을 때는 타의에 의해 헤어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길지 않다
나는 구름 속 꿈에서나마 연리지(連理枝)의 이상을 구현한다
-『시로여는세상』2003.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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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에서/ 2006.9.25.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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