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발/ 유병록

검지 정숙자 2015. 6. 6. 11:38

 

 

   

 

    유병록

 

 

  지나간 고통은 얼마나 순한가

 

  인간 하나쯤 아무렇지 않게 태우고 다니는 네발짐승 같다 말귀를 알아듣는

가축 같다

 

  소리 없이

  나를 태우고 밥집에도 가고 상점에도 들른다 달리거나 한곳에 오랫동안 서

있기도 한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

  네 등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길들여진 고통은 얼마나 순종적인가

  사나운 짐승의 시간은 이미 오래 전의 일

  네 발이 내 것 같다

 

  말을 듣지 않고 날뛰는 시간도 있다

  그러나 나를 껴안으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위험한 길

 

  참을 만한 시간이 참기 어려운 밤

 

  발을 어루만진다

  발가락을 하나씩 세어본다

  내 발이 네 것 같다

 

  나는 나를 태우고 또 어디론가 가려 한다

 

  네 등은 따뜻하고

  나는 그 커다랗고 우멍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

 

     ---------------

   *『현대시』2015-6월호 <신작특집>에서

   * 유병록/ 2010년 《동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중 대견한 것/ 김금용  (0) 2015.06.06
횡단/ 원성은  (0) 2015.06.06
감회(感懷)/ 윤성택  (0) 2015.06.05
단절/ 이해존  (0) 2015.06.05
논병아리/ 서수자  (0) 2015.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