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유병록
지나간 고통은 얼마나 순한가
인간 하나쯤 아무렇지 않게 태우고 다니는 네발짐승 같다 말귀를 알아듣는
가축 같다
소리 없이
나를 태우고 밥집에도 가고 상점에도 들른다 달리거나 한곳에 오랫동안 서
있기도 한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
네 등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길들여진 고통은 얼마나 순종적인가
사나운 짐승의 시간은 이미 오래 전의 일
네 발이 내 것 같다
말을 듣지 않고 날뛰는 시간도 있다
그러나 나를 껴안으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위험한 길
참을 만한 시간이 참기 어려운 밤
발을 어루만진다
발가락을 하나씩 세어본다
내 발이 네 것 같다
나는 나를 태우고 또 어디론가 가려 한다
네 등은 따뜻하고
나는 그 커다랗고 우멍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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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2015-6월호 <신작특집>에서
* 유병록/ 2010년 《동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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