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산문집 · 행복음자리표

핸드메이드/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5. 5. 4. 13:46

 

 

      핸드메이드

 

      정숙자

 

 

   한 잎 이파리 남지 않아도 나무는 죽지 않는다. 오히려 굳건히 살아 봄을 기약한다. 우리에게 한 마디 말 들려주지 않지만 그들은 말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생각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이 년이 아니라 더 오랜 세월 그들을 바라보고 묻고 의지해왔다. 그들의 인내와 섬세함, 너른 품이 고맙고 부러웠다. 나무는 구태여 내가 심지 않아도 어디에나 있으며, 내가 가꾸지 않았어도 낯설지 않다. 유리창 밖 키 큰 나무는 우리의 진정한 대화자이며, 울고 싶은 날의 위안이며, 속엣말 다 털어놓아도 꾸짖거나 소문내지 않는 유신(有信)의 붕우(朋友)이다. 

 

   지난 해 연말, 나는 일백하고도 열두 매의 연하장을 발송했다. 어린 날 둘러쌌던 피붙이들과, 오늘의 가정 반듯하게 끌어주는 인연들, 육날 미투리 삼아 드려도 은혜를 갚지 못할 스승님, 굽이굽이 삶을 도와주신 어르신과 친지들, 내 시집을 펴내주었거나 발표 지면을 안배해준 잡지사, 음으로 양으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선후배 또는 동료 시인들…. 그 면면을 헤아리자면 어찌 일백에 그치겠는가마는 엽서 한 장인들 허투루 남발할 수는 없는 일. 내 마음에 남은 고마움의 향훈에 따라 ‘받으실 분’을 적어나갔다. 나도 이제 오십대 중반을 넘어섰으니 말이다.

 

   오십대는 인생에서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때다. 이 연륜에 이르면 철없다는 말도 통하지 않고 아직 젊다는 자의식도 넌센스다. 그렇다고 노인의 축에 들어 섬김을 받지도 못한다. 일거수일투족 본인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매순간 부딪히고 이어지는 판단/실천의 결과가, 언행/족적의 결집이 인격 아니던가. 오십대는 오십대에 걸맞은 꿈과 현실이 있다. 어쩌면 오십 이전의 삶보다 이후의 현실에 더욱 치밀해야 할지도 모른다. 전 인생은 심신의 해이(解弛)를 값 매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생이란 있을 수 없다. 정녕 여생이란 죽음 뒤에 남는 회자이거나 뇌사의 경우에만 해당 되는 용어이리라.

 

   1) 관제엽서를 산다. 2) 신문 전단지 등에서 버리기 아까운 그림을 오려낸다. 3) 대기 중인 관제엽서에 오려낸 그림을 붙인다. 4)뭉툭한 연필로 제작일자를 쓰고 사인한다. 오늘도 이와 같은 순서로 연하장 서넛을 만들었다. 해가 바뀐 지 한 달도 채 안 되었는데 또 무슨 연하장이냐고? 이 연하장들은 내년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틈틈이 만들고 모아 해마다 연말이 되면 한분 한분 고마웠던 분들의 우편함으로 띄워 보내는 것이다. 저렴한 관제엽서지만 거기 시간과 정성을 부여함으로써 하늘 아래 단 하나뿐인 엽서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런 생산이 내 일상의 조촐한 기쁨인 것이다.

 

   엽서의 본뜻은 나뭇잎(葉)에 쓴 글(書)이다. 종이가 나타나기 이전 간단한 메모나 전달 수단으로 나뭇잎이 쓰여졌을 것이다. 어쨌든 어원이 그런 바에야 나의 연하장도 봄여름가을을 다 지난 잎사귀임에 틀림없다. 나뭇잎이 넓어지는 만큼 시간을 먹어야 하는 까닭은 일단 눈에 드는 그림이 추려져야 하고, 손가락과 눈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차분히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이 일에 소소하나마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내 집에 흘러든 일회성 그림에 한할 일이요, 시간 역시 잘라 쓰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리된다면 ‘숙자’표 엽서의 의의는 덜리고 말 것이다.

 

   나의 연하장은 대개 TV 시청 시간에 만들어진다. 귀는 귀대로 손은 손대로, 눈과 마음은 다중 패턴으로 꼬물거린다. 돌차간에도 쉬지 않고 달아나는 시간을 아끼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시간을 절약하는 데 왕도는 없다. 육신의 기능을 복합적 입체적으로 가동시켜야만 한다. 뇌와 솜씨는 쓰면 쓸수록 빛난다지 않던가. 무한 가능성이 뇌와 손끝에서 이루어진다지 않던가. 손과 뇌의 작동은 동시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다를 바 없다. 사실 나에겐 TV 시청 시간만이 머리를 비워두는 휴식이다. 그때 반찬거리도 다듬고, 옷을 깁는 등 자잘한 손일을 한다.

 

   “정성됨만이 인생을 영원으로 만든다. -괴테” 이는 『바가바드기타』를 읽으며 밑줄 친 대목이다. 하루든 평생이든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시간은 반드시 그만큼의 음영을 우리에게 되돌린다. 정성됨이란 곧 치밀함이며 참다움이다. 우리의 가장 무서운 상대는 바로 자신 안에 기거한다. 정성됨이 없는 자신, 치밀함이 없는 자신, 참다움이 없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불철주야 경계해야 할 적군인 셈이다. 이에 나는 수비군을 훈련키 위해 꾀죄죄한 여기(餘技)를 추켜들었으니 그중 하나가 버려지는 그림으로 연하장을 만들고, 명단을 작성하고 자필로써 공교히 마음을 그리는 일. 

          

   꾀죄죄한 취미가 분명 꾀죄죄한 일이긴 하나 그 성취감과 행복감이란 참으로 그득하다. 쓰레기 처리될 그림들을 한 번 더 살려주었다는 기쁨과, 그것을 만드는 동안 정화된 내면을 확인하는 보람, 장차 그것들을 띄워 보낼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바로 그 환희이다. 그 일은 하도 작아 후회할 필요가 없고, 손해날 리 없으며, 어느 누구한테도 폐 끼치는 일이 아니다. 하여 양쪽 어깨에 거치적대는 날개 없이도 날아오를 수 있는 신기(神奇)가 주어진다. 나는 연하장이 만들어질 때마다 책꽂이에 주욱 세워놓고 라라라 노래 부른다. 그림들의 어여쁨에 감탄/감동하며 잠시 시름을 잊어버린다. 

 

   우리 집 유리창 밖 후박나무는 누구에게 엽서를 띄우기 위해 그 많은 이파리를 뿜어냈을까. 우리 집 유리창 밖 후박나무는 무슨무슨 얘기를 새기기 위해 그 너른 잎들을 공글렀을까. 까치 소리, 매미 소리, 참새 소리들, 바람 소리, 빗방울 소리, 쨍쨍 내려오는 햇빛 소리들, 동네 아이들 떠드는 소리까지 오롯이 적어 천지사방 그 어디로 발송했을까. 거기 우리 집 이야기도 들어갔을까. 일천 억 헤아리는 별들에게로, 일천 억 헤아리는 은하세계로 더 먼 곳으로도 날아갔을까. 봄이면 돌아오는 연둣빛 싹은 어느 우주에서 보내온 춘신들일까. 어느 별이 어느 별에게 말 걸어오는 그리움일까.

 

   올해도 나는 몇몇 새로운 사람을 조우하게 될 것이다. 몇몇은 멀어져갈 것이고, 몇몇은 아주 잊혀질 것이다. 그들은 나를 아프게도 기쁘게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달뜨거나 속 끓이진 않을란다. 나도 이제 상당량의 체험이 쌓였으므로, 지천명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일러줘야 하므로. 나무들이 어떻게 뿌리와 꽃을 간수하는지, 키를 높이고 가지를 넓혀 가는지 보아왔으므로. 나무는 어떤 재해도 정공법으로 받아낸다. 찢기고 꺾여도 잔꾀부리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온몸으로 전력으로 겪고 견딘다. 이쪽 팔 부러지면 저쪽 팔을 내밀고, 기둥이 잘릴지라도 새움을 마련한다.

 

   비록 조그마한 연하장이지만 정성과 진정을 담아야겠기에 내 엽서는 매년 핸드메이드가 원칙이다. 자세를 고쳐 앉아 발신지도 일일이 손으로 쓰고, ‘받으실 분’ 주소 역시 육필로 옮기며 정리해둔다. (내 주소는 부득이 볼펜을 사용하는데 굴러다니는 볼펜들을 제때에 쓰지 않으면 잉크가 굳어 내버리게 되니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만년필 Blue/Black ink는 수신자의 주소와 내용을 적을 때만 쓴다. 사소하지만 내 딴엔 그것도 예의인 것이다. 7mm× 1.4cm짜리 낙관도 한장 한장 위치를 보아 자를 대고 찍는다. 이토록 정치(精緻)한 행위도 시작(詩作)에 비하면 천 배는 쉽다. 

 

   나무는 포기하지 않으며 방만하지 않으며 자살하지 않는다. 실뿌리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일어선다. 병들었을 때, 진짜 더는 살 수 없을 때,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죽어질 때만 숨을 거둔다. 그 침착함과 따뜻한 정신을 나는 ‘식물정신’이라고 명명했다. 설날이 남아 있어 아직도 간간히 연하장이 날아든다. 속지에 적힌 행복과 행운을 나는 믿는다. 내 이나마 실족하지 않고 살아왔음은 그 많은 분들의 기도가 함께 했기 때문이리라. 손쉬운 이메일과 문자메시지가 어찌 옛 풍속의 깊이를 따를 수 있으랴. 연하장 발송은 나의 열두 달에서 가장 큰 연중행사이며 산뜻함이다.

 

                                                               2008.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