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산문집 · 행복음자리표

어부슴/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5. 5. 1. 12:22

 

 

      어부슴

 

      정숙자

                                                                                    어부슴: 음력 정월 보름날, 그해의 액막이를 위

                                                                                    하여 조밥을 강물에 던져 고기가 먹게 하는 일.

 

 

   ‘집요’라는 말은 ‘간절하다’는 의미와 가깝다. 그리고 ‘집요’와 ‘간절함’은 ‘꿈’이라는 한 음절로 통합된다. 내가 지금 얘기하려는 꿈은 바람(希望)이지만 잠잘 때 꾸는 꿈(夢)과 너무도 많이 닮아 있다. 어떤 사람의 꿈이 용꿈을 꾸는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는 그 꿈을 꾸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반신반의하거나 확신하거나 어쨌든 간절히 원할 것이며 집요하게 생각하고 연구할 것이다. 그런데 그 용꿈을 꾸려는 자가 한 사람이 아니고 둘이나 셋, 아니 더 많은 숫자일 경우 그들은 경쟁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오늘 어떤 꿈을 가졌는가? 전 생애의 중심에는 무슨 꿈을 걸었는가? 꿈이란 우리의 삶을 비추고 이끄는 북극성이지만 고난, 절망, 좌절을 체험케 하는 근원이기도 하다. 원망과 비탄을 품은 채 숨진 사람이, 또한 그렇게 숨질 사람이, 이 순간 그렇게 숨넘어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하여 어느 어진 이가 이 세상을 사파(娑婆)라고 명명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구러 우리 모두는 풍랑 위에 떠도는 한 척 조각배! 어찌 하루하루가 위태롭지 않겠는가. 어찌 꿈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파충류가 아닐까? 그러므로 용꿈을 염원하는 이라면 뱀도 무시하지 않을 것이며 사슴(뿔), 말(코), 귀신(눈), 잉어(비늘), 독수리(발톱)도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이 골똘한 사고와 실천 의지를 세워주는 동력일 것이다. 용꿈을 원한 자라면 분명코 용꿈 너머에 현실적 꿈이 있었을 테고, 그 꿈을 실현키 위해 용꿈을 꿈꾸었을 게다. 겉모양만의 용이 아니라 진짜 용을, ―잠룡(潛龍)에 그치고 마는 용이 아니라 천기를 조절하는 비룡(飛龍)의 꿈을 말이다.

 

   아토초, 하루하루, 매월, 매해를 충실히 탑 쌓지 않으면 ‘이룸’의 신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만일 어느 누가 운이 좋아 성공했다 하더라도 피나는 자기 노력의 선행이 밑받침되었으리라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부모, 스승, 자신의 역량, 기타 등등의 환경 여건에 따라 꿈 높이가 천차만별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목표가 이루어졌을 때 소유하는 행복감은 서로 다르지 않으리라. 나 역시 한 방울의 잉크를 살리기 위해 남몰래 눈물을 찍어가며 뼈를 갈던 시절이 있었다. 

 

   시(詩)에 너무 일찍 경도되어 정규코스의 학업을 포기했을 때, 그때 내 인생은 연옥을 선택했던 것. 스승과 선후배, 모교와 동료 없이 문인사회에 착근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줄에서 줄로 이어지는 사회의 레이스에 혼자 던져졌다는 사실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틀어 참으로 지난하고도 혹독한 형벌이었다. 기댈 데라곤 자신의 정신력과 천지신명뿐인 그 절벽 끝에서 가족들이 외출한 틈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 내어 울었던 날들…. 아픔으로 아픔을 지워야만 했던 나달들.

 

   <어부슴이라는 낱말이 있다는 것도 모를 때였어. 내 몫의 저녁밥을 싸들고 동작대교를 향했지. 옛사람들은 수표교를 밟았다지만 우리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곳이 동작대교였거든. 밥을 덩어리째 던지면 고기들이 골고루 먹을 수 없겠다싶어 물을 말아서 가지고 갔지. 빈손으로 소원을 빈다는 게 참으로 염치없는 일 같았어. 물고기에게 한 끼 밥이라도 베풀면 달님뿐 아니라 하백(河伯)께서도 심정을 좀 알아주시지 않을까! ‘좋은 글’ 에 대한 일념을 품고 하늘에 밥알을 뿌리던 내 기억 속의 정월 대보름….>

 

   지갑이 두둑한 사람은 금전으로 행운을 사고, 권력이 든든한 사람은 그 배경으로 실리를 사고, 허리가 부드러운 사람은 아첨으로 내일을 산다. 그러나 빈곤하고 나약하며 곧은 사람은 하늘의 뜻을 구할 수밖에 없다. 맑고 따뜻한 마음 일구어 온 누리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 어렵사리 돋아난 풀 한 포기, 발부리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 짓까불고 떠드는 촉새/콩새까지도 하느님의 몸이겠거니…, 내 꿈을 하느님이 돌아보게끔, 내 안에 하느님이 머무시게끔, 그렇게 엎드릴 밖에 다른 길이란 없다. 

 

   아직껏 글에 얹힌 손목을 보면 그때 그 물고기들이 내 꿈을 달님에게 잘 전해준 모양이다. 순수 투명한 미물의 영혼이 하느님에겐 더 가까울 터이므로. 그리고 또 간곡한 기도란 각오와 집념의 표상이므로. 기도하는 자는 꿈을 위해 정진하는 자이거나 매진하는 자이다. 꿈이 없는 자는 축원하지 않는다. 꿈을 향해 365일을 아끼는 사람과 265일을 아끼는 사람의 각거리는 세월과 더불어 엄청나게 벌어져 버리고 만다. 커다란 재난이 덮치지 않는 이상 누구의 불행도 운명에 떠넘길 수만은 없다.

 

당신이 만일 꿈을 향해 출발한 젊은이라면 꼭 당부해두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일지라도 ‘인간을 버리지 말라’는 점이다. 당신이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당신이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의 앞길을 막지 말며, 당신이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의 등에 칼을 던지지 마라. 어려울 때 애써준 사람을 배신하는 행위는 인 ․ 의 ․ 예 ․ 지 ․ 신을 저버렸음이니 누가 그를 인간이라 하겠는가. 그런 수단으로 성공을 거둔 이가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과 성공을 속인 자이다.

 

   해넘이 전에 이 일만은 꼭 마쳐야겠다 싶은 하루치의 꿈. 이번만큼은 지출을 줄여 지난 달의 적자를 메워야겠다 싶은 한 달 치의 꿈. 올해엔 이 일을 결단코 해내야겠다 맘먹은 일 년 치의 꿈. 이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감지 못할 거야 싶은 전 인생의 꿈. 우리의 삶은 그러한 꿈과 계획에 의해 나날이 조율된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쌓여 길이 되고 마침내 목적지에 닿게 된다. 나다니엘 호오손의 『큰 바위 얼굴』을 보라. 주인공 어어니스트의 일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취해야 할까.

 

   뿔, 코, 비늘, 몸통, 발톱의 외양을 두루 갖추었다 해도 모두가 진룡(眞龍)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풍진 세상을 박차고 승천하려면 입안에 여의주가 물려 있어야만 한다. 사정이 이러한 즉, 여의주 없는 용이라면 그 거푸집을 무슨 근거로 용이라 할 것인가. “용용 죽겠지?” 참으로 딱한 풍유요 해학이다. 용꿈을 목표한 자는 모름지기 정신이 용이 돼야만 한다. 빼어난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자신이 송두리째 시가 되어야 하고, 유능한 법관이 되려는 자는 응당 자신의 내면이 법전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리라.

 

   여기서 잠깐 여의주에 대해 헤아려 보자. 여의주란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반드시 입에 물어야만 등천할 수 있다는 그것. 그것은 ‘침묵’의 이미지가 아닐까. 침묵은 ‘인내’이고 인내는 지구력이니만큼. 용이 하늘로 올라갈 때는 먹구름과 천둥번개에 휩싸인다고 한다. 그 막바지 고통을 참지 못해 악쓰거나 투덜댄다면, 다시 말해 입 벌린다면 여의주는 일탄지에 굴러 떨어져버리고 말 것이다. ‘이를 악물고’라는 말 속에는 ‘여의주를 놓치지 말고’라는 의미가 내포되었음을! 

  

   낼모레 대보름에도 많은 이들이 소원을 빌며 다리 밟기를 즐길 것이다. 어부슴을 마련하거나 촛불을 밝힐 것이다. 저마다 꿈을 이루기 위해, 화려한 생을 펼치기 위해, —혹자는 세상의 갈채를 받을 것이고 혹자는 『큰 바위 얼굴』의 어어니스트가 될 것이다. 나는 올해도 ‘잉크’를 위해 이빨이나 악물어야겠다. 그리고 또 하나 이것도 빌어야겠다. 많은 이의 궁극 목표가 ‘인간’이기를. 어떤 정황에서도 ‘인간’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선택하기를. 그리하여 많은 이의 늙어진 어느 훗날이 돈후와 여유로 행복하기를.

 

                                                                      2008.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