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우리는 즐거운가?
정숙자
왜 다들 웃고 있는가. 고통은 꼭 숨겨야 할 형질인가. 슬플 때 슬프다고 말하면 안 되는가. 가면들, —타인을 속일 때 자신이 속고, 자신이 속을 때 타인이 다시 속는다. 속이는 자들은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다. 앞에서 웃고 뒤에서 친다. 어쨌든 영역을 확장하며 나아간다. 그것으로 장땡이다. 사기충천! 타인의 울음이 제 웃음보다 달콤하다. ‘나는 진화 중이야’ 파안대소한다. 문인석/무인석도 구별하지 않으며 넓혀야 할 경계가 무엇인지 숙고하지 않는다. 실존의 최고 진화형태는 <순수>인 것을, 엉뚱한 것을 차지하려고 너도나도 막무가내 입 꼬리를 치킨다. 간략히 추린 이 메모가 원시시대로부터 발전해온 우리의 현재 주소다.
나는 머그잔) 내 거처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본동에 위치한 베이커리 ‘파리크라상’이다. 오늘도 나는 고객의 테이블 위에 놓였다. 내 옆으로는 넓은 유리창, 유리창 너머로는 분주히 오가는 차량들이 보인다. 인도를 거니는 사람들은 언제나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얘기하거나 웃으며, 또는 묵묵히 팔다리를 흔든다. 비 오는 날, 눈 내리는 날, 흐린 날…. 나는 몇 년째 동일한 풍경을 보아왔다. 십 년이나 백 년 뒤에도 인간들의 행보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느리거나 조금 빠르게, 헐레벌떡 뛰거나 넘어질 따름. 십 년씩 묶는다 해도, 그 묶음이 최대한 열 개라 해도 백 살 안쪽의 연령대가 골고루 섞여 흐를 것이다. 어느 한 사람 죽지도 않고, 마치 꽉 짜여진 구성원이 걷는 것처럼! 사람들이 나를 볼 때도 그렇겠지. 그 컵이 그 컵일 거라고, 아니 관심조차 없겠지. 나는 저들의 경쟁자도 아니고 우정이나 애정을 나누는 사이도 아니며 더구나 철천지원수도 아니니까. 다행이야. 인연에 코를 꿰이지 않았다는 건 자유의 상징이거든. 난 그저 물건일 뿐이므로 스스로 씻지 않아도, 걷지 않아도, 돈벌지 않아도 그만이다. 언제 어디서든 놓여지는 대로 놓이면 돼. 정말 게으른 인간이 있다면 내세에선 컵으로 태어나라고 권하고 싶다. 당신 주변에 그런 종자가 있다면 ‘내세에선 컵으로’라는 말을 좀 전해주시오. 잠깐, 잊은 말이 있소이다. 기왕이면 눈을 호릴 만큼 육체미가 빼어난 잔일랑 말고 박스형으로 된 머그잔이라야 최대한의 안정감이 확보된다고 덧붙여주시오.
나의 닉네임은 검지) 재작년에 동생이 지어준 닉네임 검지(劍智)이지만 엄지가 아닌 검지의 뜻으로, 알파가 아닌 베타의 의미로 바꿔치기했다. 우리 한국문단에서 별 볼일도, 별 하자도 없는 한미한 시인이거늘! 오죽하면 ‘파리크라상’ 창가에 구겨져 머그잔과 대화를 텄겠는가. 컵들의 세계로 치면 나 역시 머그잔 정도의 반열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품계가 싫지 않다. 싫기는커녕 고맙기 그지없다. 시인이란 본래 플라톤의 『국가론』에서도 추방당한 존재가 아니던가. ‘국가’의 피댓줄을 돌리는 데 ‘시인’은 진정 쓸모없는 너트일까, —서운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즈막엔 반기를 들어올릴 의지마저 희미해진다.
나는 머그잔) 나도 곡선과 손잡이가 섬세한 잔으로 태어나고 싶었다. 몸통 전체를 햇빛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유리잔이 부럽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 유전자는 규사(硅砂)가 아니기에 늦게나마 분수를 알아차렸지! 그리고는 머그잔의 임무수행에 차질을 빚지 않으려고 꾸준한 노력을 보태고 있다. 컵 주제에 무슨 노력이냐고 비아냥대고 싶은 분이 혹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컵에게도 생각이 있다는 걸 차제에 밝혀두련다. 고객의 부주의로 굴러 떨어질 경우, 우리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심지어 떨어지는 찰나에도 다시 뛰어오르려 버둥거린다. 바닥에 내리쳐졌더라도 깨지지 않으려고, 깨진 다음일지라도 조각조각들이 서로 붙잡으려고 손을 내민다. 사람들은 급전직하(急轉直下)로 떨어진 줄 알겠지만 모르는 말씀. 그건 사람들의 시력 탓이다. 무한대로 펼쳐진 시공간에는 인간의 가시권을 벗어난 분자들이 너무나 많다. 내 몸 하나 부서지는 것쯤이야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우리 컵들은 하시라도 공손히 종말을 수용한다. 굳이 깨지지 않으려는 이유를 들자면 실수자의 난처한 입장이 하나, ‘파리크라상’ 종업원에게 돌아갈 번거로움이 둘, 그리고 돌차간일지언정 옆자리의 고객들에게 번질 불안감이 세 번째다. 우리 컵들도 낮에는 테이블에 올려져 긴장하지만 밤이면 동료 컵들과 느긋이 이야기한다. 당신의 청력이 박쥐의 데시벨 정도만 된대도 지금 내 얘기가 무척 크게 들리련만…. 아참, 게으름뱅이는 안 되겠어요. 당신과 속내를 정리하다보니, 좀 전에 한 말 ‘내세에선 컵으로’라고 한 그 말 회수합니다.
나의 닉네임은 검지) 시인은 혼자만의 국가에 살아야 할 잉여인간인지도 모른다. 문학이 누렸던 한때의 부흥기도 쇠진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타고난 소질을 어쩔 수 없어 많은 문인들이 헛헛한 숙명을 짐 지고 산다. 어릴 때 동경했던 문인이란 얼마나 높고 맑고 빛나는 별이었던가. 보통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옷 속에 날개를 감춘 신선이거나 천사쯤으로 믿고 존숭했었다. 그러나 나는 시인의 강을 노 저으면서 야릇한 물살을 더 많이 보고 겪고 인내하였다. 되돌아가기엔 너무나도 멀리 와버린 길. 내 심신과 에너지를 오로지 그 길에 퍼부었으니! 딴 재주라곤 습득치 못하였으니! 어쩌랴, 나는 이 강에서 군말 없이 죽을 것이다.
나는 머그잔) 인간의 일생은 참으로 짧아 보인다. 컵들의 연조는 빅뱅(big bang)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오늘 깨어져 묻힌다 해도 오랜 침식을 거쳐 다시 태어날 것이다. 컵들은 습생(濕生)이나 화생(化生) 난생(卵生)이 아닌 우주 태초의 물질이므로 자연의 정보 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안데르탈인뿐 아니라 은하계에 대해서도, 백악기 삼엽충 지질변화에 대해서도 웬만큼은 안다. 당신이 무심코 걸어갈 때 발부리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도 당신보다는 엄청난 경험론자다. 나도 인간의 피와 해골과 살까지를 두루 맛보았다. 어느 도공이 나를 구워냈기에 잠시 컵으로 머무를 따름. 곰곰 헤아려보면 머그잔이어서 좋은 점도 많다. 그 중 하나만 집어내볼까. 다양한 컵 가운데 내 귀보다 더 큰 귀를 가진 컵이 있다면 알려주시오. 사람들은 내 귀를 손잡이로 사용하지만 개의치 않소이다. 테이블에 놓여 고객의 이야기를 경청하다보면 자부심도 우러난다. 귀라고 생긴 게 겨우 모양만 붙은 에스프레소 잔을 건너다보면 측은지심이 솟구친다. 훤히 듣지 못하는 갑갑증과 그로 인한 무료에 시달리다니! 잠시라도 내 귀를 빌려주고 싶다. 역시 겉모양보다는 실속이 제일이야. 고객들은 나를 몰라보지만 나는 그들을 안다. 자주 오는 사람, 따뜻한 사람, 우울한 사람, 허풍스런 사람, 무난한 사람 등등. 그러나 누구한테도 각별한 애정은 품지 않는다. 컵들은 즉각적 운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정신주의자이며 초월자다. 우리 컵들은 늘 이타심으로 기도하고 봉사한다. 그리고 그 생활이 즐겁다. 우리는 진정 헛웃음 따윈 치지 않는다.
정말로 우리는 즐거운가? 누구를 만나든 왜 웃어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우리는 어느덧 ‘웃음이 나올 때’ 웃는 게 아니라 ‘웃어야 할 때’ 웃는 작위인간이 되어버렸다. 그건 가장 손쉬운 사기이며 범죄의 시발선이다. 웃음 식별법이라도 연구해야 수비가 가능해질까. 거짓으로 홀리는 웃음 뒤에는 참으로 흘리는 눈물이 있다. 머그잔과의 대담을 속기하다보니 1회분의 잉크가 다 되었다. 괴로울 때 괴로워하고 슬플 때 슬프다고 말할 수 있는,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가 그리워진다. 자 그러면 오늘은 여기서 안녕. 아직도 창창한 우리의 남은 날들을, 어떻게 웃고 또 울어야 복락원의 한 귀퉁이나마 회복할 수가 있을까.
2008.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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