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몸 샅샅이 먹기
정숙자
오늘 2008.7.9. 10:19, 첫 매미가 울었다. 반갑고도 정답다. 삼십 도를 넘는 더위가 며칠째 계속되었는데 왜 이리 조용할까? 철저한 방역으로 땅속 미물들마저 요절난 것은 아닐까? 걱정하던 판이었으니 맴- 맴- 맴- 매엠~ 날아드는 소리줄기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특히 우리 동네 매미들의 악다구니는 서울 장안에서도 추종불허의 악명을 떨쳐온 지 오래다. 요 몇 년 사이 수면방해다 소음공해다 텔레비전 뉴스에 오르내렸고 동네 사람들의 원성 또한 매미 울음과 맞먹는 추세였다. 그래도 나는 해마다 시원히 파도쳐오는 그들 매미군단을 그리워하고 기다렸다. 사람들이 그토록 성가셔하는 고래고래 소리도 실은 매미의 잘못이 아니다. 주위의 소음보다 큰소리로 울어야만 짝짓기 상대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으니, 그들에게는 종족보존을 위한 필사의 전략일 테니 말이다.
맴- 맴- 맴- 매엠~ 또 매미소리가 들린다. 두 번째 조율음이다. 오늘은 첫날이므로 풍성히 울어주지는 않을 모양이다. 동료들보다 먼저 날개를 편 한 마리이리라. 내 옷깃을 여미고 앉은 지금 때맞추어 현(絃)을 고르다니! 장차 몰려올 저들의 음파가 설령 아폴론의 하프가 아닌 디오니소스의 고성방가라 해도 나로서는 감개무량 귀할 따름이다. 어느 오케스트라의 선율인들 저보다 청아할까보냐! 저들의 화음은 누구한테서 배우고 익힌 기교가 아니라 하늘에서 곧장 들고 나온 아악이기 때문이다. 단 며칠 동안에 한 생의 말을 다 비워야 하기에 그토록 절절한 것일까. 어쨌든 매미소리가 높이 뜨면 능소화도 한창 붉고, 능소화가 만발하면 수박의 단맛 또한 절정에 달한다. 태양에 가장 가까운 반지름 위치로 지구가 자전을 거듭하며 공전해 나아가는 요즘….
수박 한 덩이를 쇼핑한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남의 몸 샅샅이 먹기’라는 제목은 ‘생각은행’ 2004.6.28. 23:36분에 기입해 둔 말이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해 두지 않는다면, 또한 그 메모들을 잘 보관하지 않는다면 어찌 순간순간의 상상력을 지켜낼 수 있겠는가. 자신의 머리에서 솟구친 착상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어’ 다르고 ‘아’ 다른 게 문장이기 때문에 즉시즉시 기록해 두지 않으면 최초의 말맛을 상실하고 만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생각은행’이고 나는 그 노트의 덕을 톡톡히 보는 자신의 고객이다. 집적의 결과는 경제뿐 아니라 메모 하나에서도 큰 보람으로 이어진다. ‘생각은행’ 아니었으면 무슨 수로 ‘남의 몸 샅샅이 먹기’가 4년 전부터 이행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으랴. 쉰을 넘기고서야 겨우 수박 한 통을 깔끔히 먹게 되었으니….
그 점 하늘에 대해 미안한 일이다. 나이 들수록 정신력이 떨어지고 순수성이 와해될 거라는 생각은 빗나간 추측이 아닐까. 어린 시절 무심코 잡아 족쳤던 곤충이나 풀꽃에 대한 참회, 의복이나 음식에 대한 경외감, 물 한 바가지에 대한 애정 등이 바로 그 등고선이다. 삼사십이나 그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도 아주 무심했던 건 아니지만 작금에 이르러 미세한 자연 사랑법이 속속 깨우쳐진다. 그는 찰나적인 눈뜸이 아니고 오랜 세월 마음에서 떠돌던 사물과 나와의 관계적 소산일 것이다. ‘웬 서론이 이렇게 길어?’라고 화증(火症) 치미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니 이제 그만 본론을 내놔야겠다. 오늘 펴 보일 「남의 몸 샅샅이 먹기」에서 ‘남의 몸’이란 좀 전에 얼핏 언급한 수박이 그 주인공이다. 구체적으로 밝히자면 수박을 샅샅이 먹게 된 취지와 껍질까지도 버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코자 함이다.
내가 수박껍질에 관심을 모은 시기는 삼십여 년 전부터다. 그런데 1) 새콤달콤 무치기 외에 별다른 요리를 창안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반찬은 맵고 짜서 수박 한 통 분량을 소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 간혹 버릴 수밖에 없는 수박껍질을 마음에서만은 버리지 못하고 늘 고심했다. 그러던 중 2004.6.28. 23:36분에 ‘번쩍’하고 아이디어가 스쳤다. ‘껍질’이라는 고정관념만 바꾸면 무와 마찬가지로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번쩍’하는 빛이었다. 나는 본래 시골내기. 생고구마와 무를 무시로 깎아 먹으며 자랐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도 윤초시댁 손녀가 보는 앞에서 무를 뽑아 한입 베어 문 소년이 “아 맵고 지려!” 하면서 던져버리는 장면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새푸르스름한 수박의 속껍질을 과일 삼는 일쯤 조금도 불편한 사안이 아니었다―아니다.
겉껍질 벗긴 수박껍질을 깨끗이 헹궈 2) 나슬나슬 썬 다음 프라이팬에 기름을 서너 방울치고 볶아 간을 맞추면 부드럽고 향긋한 나물이 된다. 싱겁고 살찔 염려가 없어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그리고 또 3)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고 과일 대신 소비하면 좋다. 당도가 전혀 없고 칼로리도 낮아 당뇨환자라 해도, 포만감을 즐겨도 해롭지 않으리라. 그러나 요주의! 좋은 일엔 반드시 정성이 따라야 하는 법. 이 모든 디자인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뚝뚝 자른 수박을 하모니카 부는 폼으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치아 자국이 남은 껍질은 청결치 못하므로 처음부터 칼자루를 쥔 이의 구상에 따라 주사위형이든 세모꼴로든 분리하는 게 좋다. 그러나 부득이 하모니카를 분 경우라도 잇자국 단면을 칼로 걷어내면 된다. 나는 어제 최초로 올여름의 신개발품 수박깍두기를 담갔다.
껍질을 한꺼번에 손질할 수 있는 방법, …윗부분을 둥글게 잘라 뚜껑으로 여닫아 보자. 때때마다 적당량을 예쁘게 파내어 접시에 담자. 내부가 텅 비면 절단에 들어가자. 겉껍질을 벗길 때 손을 벨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 4) 깍둑썰기를 한다. 무 깍두기와 똑같은 양념으로 버무린다. 이건 염장법이므로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어 좋다. 무보다 딱딱하지만 그것이 흠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저작근운동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저작근을 움직이면 삼차신경이 발달된다고 한다. 삼차신경이란 제5신경이라 불리는 가장 큰 뇌신경이고 눈, 위턱, 아래턱의 세 신경으로 나뉘며 지각성의 대부분과 운동성의 소부분으로 얼굴에 분포되어 있다 하니 얼마나 중요한 기관인가. 그러나 내가 수박껍질을 애호하는 진짜 이유는, 이런저런 이득 때문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존중이며 환경오염을 줄여보자는 뜻에서다.
수박의 자매로는 흥부를 벼락부자 만들어준 박과 애호박 시절을 거친 늙은 호박이 있고, 그들을 지배하는 우리의 대갈박이라는 게 있다. 넝쿨을 뻗고 열매 맺으며 씨앗을 남긴다는 인연설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나 우리나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수박은 온몸에 칡넝쿨무늬를 두른 그 풍채만큼이나 늠름한 열매채소의 제왕이다. 애살스런 과일칼로는 쪼갤 수 없고 반드시 식칼을 들어야 한다. 붉디붉은 속살은 또 어떤가. 철철 흐르는 과즙이며 샅샅이 먹을거리가 되어주는 후덕이며, …가히 우리의 재래종 소―칡소에 견줄 만하다. 무더운 날의 수박 한 덩이는 농부들이 도시로 올려보낸 선물이며 태양의 메시지다. 수박 한 덩이에는 수박 한 덩이를 사는 데 지불한 돈만으로는 계산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쌔캄쌔캄 씨앗들은 새빨간 과육에 새긴 신의 문자이니, 첫 독자인 부엌데기의 기쁨 또한 하늘만큼 큰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동물은 생존을 위해서만 남의 몸을 먹는다. 그들은 일단 포획한 먹잇감을 맛없다고 투정하지 않으며 남기지도 썩히지도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음식을 낭비하고 맛을 핑계 삼아 내버릴 뿐 아니라 잘못 간수하여 부패시킨다. 나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믿지만, 그렇다고 수박을 대충 먹고 버리는 것과 샅샅이 먹는 것과의 차이가 없다고 보지 않는다. 참깨 한 알이든 볼펜 한 자루든 수박 한 덩이를 대함과 다르지 않다. 될 수 있는 한 소박하게 먹고 입고 물자를 아껴 내 무례한 발을 품어준 지구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전하고 싶다. 이제 곧 매미 떼가 땅 속에 묻혔던 지난날을 환희로 바꾸어 노래 부를 것이다. 수십 수백 광년 저쪽의 별빛을 우러러 능소화도 더 많이 필 것이고, 나는 1) 2) 3) 4) 외에 또 다른 메뉴를 개발할 수 없을까 두고두고 느린 모색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08.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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