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
정숙자
행복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분명 존재하지만 보이거나 잡히지 않고 어느 누구한테도 푸근히 정착하지 않는다. 아무리 질 좋은 물감과 캔버스가 주어진다 해도 그려내기 어렵다. 그러나 모두들 그를 그리워하고 다시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다시 만나다니! 언제 그와 헤어졌던 것일까. 그를 몰라봤던 때, 그 시름없던 때를 거개의 사람들은 어린시절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또 붕우유신이 움텄을 때, 꿈꾸던 사랑이 찾아왔을 때, 첫 월급을 탔을 때, 좋은 책을 읽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등등 행복은 호홀지간 산발적으로 우리를 황홀케 했다—한다. 깃털도 없이 날아다니는 그 행복은 도대체 어떤 형질인가? 무슨 형태인가? 많은 철학자와 종교인, 예술가들이 분석하고 노래하고 가르침을 주었지만, 행복은 여전히 과거형이거나 미래에 속할 뿐, 현실과는 운니지차(雲泥之差)의 거리를 고수/견지한다.
백화점에 들어서면 코너마다 언니들이 환하다. 주차장에서도 언니의 영접을 받는다. 음식점 역시 공손한 언니가 메뉴와 함께 웃음을 선사한다. 은행 창구엔 산뜻한 표정의 언니들이 시종여일 상냥하다. 병원, 커피샵, 동사무소, 우체국, 고속버스 매표구, 심지어 새마을금고에 이르기까지 언니들이 아니면 마비 사태가 빚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언니들은 방문자의 무례에 비켜설 줄 알며, 고객의 퉁명을 인내할 줄 알고, 서툰 매너의 막능당일지라도 부드러이 수용하고 덮을 줄 안다. 이 세상의 절반은 그 많은 언니들 덕분에 외유내강을 잃지 않으며 행복을 겨냥할 수 있으리라. 이르다 뿐이겠는가. 달포 전에는 ‘이소연 언니’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우주에 날아올라 전 세계에 국위를 선양했으며 최첨단과학화시대의 막을 열었다. 무한차원의 그 많은 언니들을 나는 진정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며 기대한다.
햇빛에선 잎이, 어둠에서는 뿌리가 자란다. 그러므로 가을겨울에는 뿌리가, 봄여름에는 이파리가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 명암의 매개자는 천지조화의 섭리를 아우르는 기둥이다. 단연코 기둥이 튼튼해야지!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유아기 때는 숙명의 지배를 받는다. 국적, 부모, 성별, 혈액형 등 백골이 진토 된대도 바꿀 수 없는 뼛골이 바로 숙명 아니던가. 그러므로 숙명은 개인의 기지나 의지로써 뒤바뀔 수 없다. 그러나 운명은 숙명 외적인 상황이며 개선을 함유하는 영역이다. 혼자서는 존립이 힘든 영아기와 유아기, 소녀 시절을 지나 언니 단계에 이르면 운명과 대치하거나 우회할 만한 다이어그램을 손수 짤 수 있다. 그 다음엔 설정된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 시간을 도구화한다. 시간보다 더 확실한 자본은 없으리니 건강과 시간, 끊임없는 노력이 합쳐진다면 보다 탄탄한 인생의 정초를 다지게 될 것이다.
행복이라는 의미는 말 그대로 ‘행복’임에도 불구하고 왜 늘 쓸쓸함을 수반하는가. 너무 완벽한 덩어리여서 그럴까. 아니면 나의 행복이 쪼그랑바가지 신세로 휑뎅그렁하니 비어 있기 때문일까. 어쨌든 나는 ‘행복’에 대해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는 열서너 살 무렵의 추억 한 조각을 갖고 있다. 당시 음악 선생님이었던 K는 나에게 불행을 강요했었다. 수업시간이면 ‘산타루치아’나 ‘보리수’보다는 ‘갑돌이와 갑순이’를 더 열심히 가르쳤던 K. 교실마다 K가 들어서면 함부로덤부로 환호작약이었다. 어느 날 K는 수업을 진행하다 말고 “현재 자기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 손들어 봐요.”라는 것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손을 들었다. 왜냐하면 자애로운 부모 형제,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 또는 나보다 열악한 처지의 사람들을 비교할 때 ‘손을 들어야 해’ 라고 진단했기에.
그러나 인기 여선생님 K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때나 저때나 나는 내 생각에 잠겨 남의 눈치를 살필 줄 모르는 둔자바리이니—였으니! 반 전체에서 손을 든 사람은 나 혼자였으니! 게다가 나는 학급을 빛내는 수재도 아니었고 ‘갑돌이와 갑순이’를 환영하는 무리에서도 동떨어진 어리보기였으니! K는 나를 향해 “손 내려!” 하더니 “지금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장차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에요. 자기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라야 발전할 수 있는 거예요.” 했을 뿐 나에게는 ‘행복의 이유’라거나 그 밖에 어느 것도 묻지 않았고 어린 것의 자존심 따위야 아랑곳없이 즐거운 수업을 이어갔다. 손을 내린 나는 좀 무안했지만 K의 ‘불행론’이 전적으로 옳다고만은 접수하지 않았다. 종아리가 덜 자란 인간일지라도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획일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로부터 40여 년이 흘렀지만 그 사실이 내 안에서 여태 굴러다닌 까닭은 그것이 단순한 농이 아니고 ‘행복론’의 서로 다른 철학적 견해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언니교사’였던 K도 지금쯤 고령의 할머니가 되었으리라. 아이들이란 얼마나 이상한 기가비트인가. 잊어버릴 것 안 잊어버릴 것 구분 없이 대량으로 저장하니 말이다. ‘갑돌이와 갑순이’를 목청껏 따라 부르게 하다가도 교장 선생님 그림자가 비칠 양이면 검지를 입에 대며 멈추도록 리드했던 K. 날라리 끼가 다분했던 K도 돌이켜보건대 새 물결을 갈망하는 발군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K의 성명을 외우거니와 그 세 음절을 밝히지 않는 소회는 ‘행복’이라는 콘텐츠를 일찍부터 엿보게 해줬으므로, K로서는 한 터럭도 떠올리지 못할 터이므로, 온전히 나 혼자만의 재산이 되어버렸으므로, 감사 외에 자칫 다른 뜻이 끼어들지도 모르므로….
언니, 언니, 언니들이여! 바람 부는 날, 눈비 오는 날, 뜨겁고 춥고 안개 짙은 날, 화창하다 못해 펑 펑 펑 꽃 송이송이 피고 지는 날 우리는 모두 고고성을 지르며 어머니라는 대지를 뚫고 나온 수목들이다. 어머니도 한때는 어린이였고 소녀였고 언니였나니! 어머니의 가슴엔 어린이와 소녀와 언니가 옛 모습 그대로 살아, 그대들을 바라보고 대화하고 염려하며 축복하나니. 그대들 또한 머지않아 어미가 되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언니시절을 회상하리니 그대들의 오늘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싱그러운가 그리고 또 위태로운가. 나는 이 자리에서 행복에 대한 방법론은 제안하지 않으련다. 그런 거라면 일찍이 선현들께서 수많은 금언을 남겼다. 그 중 어느 하나만 실천하더라도 우리는 행복에 안주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행복이란 그리 녹녹한 상대가 아니다. 한곳에 머물기에는 너무나도 분방한 선수다.
내 오랜 체험으로 속내를 털어놓거니와 아예 행복이라는 바람을 우리 쪽에서 따돌려버리자—잊어버리자. 차라리 발목 떠나지 않는 그림자를 사랑하자. 아끼고 어루만지며 따뜻하게 대하자. 간혹 우리를 쫓는 불운, 비운, 악운 속에서도 의연히 기둥 세우자—가지도 뻗자. 일초일순 우리의 감각은 삶의 뿌리와 열매를 위해 광합성한다. “생각을 통해 새로운 사고방식을 연습하면, 우리는 신경세포를 재구성할 수 있고 뇌가 움직이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달라이라마의 행복론』-달라이 라마 ‧ 하워드 커틀러 共著). 희로애락은 우리 마음대로 골라가질 수 없지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답안을 돌려놓을 수 있다. 남녀노소 고른 웃음으로 대하며 사회의 윈도우를 빛내는 언니들. 때로는 눈물을, 때로는 돌아서서 피눈물을 닦기도 했을 언니들이여! 나는 앞으로도 그대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대들의 친절을 입게 될 것이다. 땡큐땡큐!
그 많은 언니는 뉘댁 따님들일까. 참말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처자들일까. 저녁이면 집에 돌아가 씻고 밥 먹고 잠드는 사람들일까. 어느 먼 곳으로 날아갔다가 아침이면 내려오는 천사들은 아닐까. 난 진짜 궁금했다—하다. 그 많은 언니들 중에 내가 아는 얼굴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까닭이다. 이 얘기를 시로든 수필로든 꼭 한 번은 써야겠다고 몇 년째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언니들’, (오빠들에겐 미안…) 아니아니 ‘미안’ 취소~! 언니들은 결국 오빠들의 연인/아내가 될 것 아닌가. 이 모든 이야기가 바로 오빠들의 행복 아닐까. 나는 우리의 언니들이 연년세세 사랑받는 여자로, 행복한 여인으로 나이 들기를 빈다. 오늘 행복하기를, 지금 행복하기를, 시시각각 행복하기를. 그리고 그 행복은 보편적 행복이 아니라 창조적 기둥의 주관적 행복이기를 바란다. 한 끗 근심도 살뜰히 돌볼 줄 아는 신개념 행복이기를 빈다.
2008.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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