뻑 교수와 붕 시인
정숙자
뻑 교수를 조우한 지도 근 10년이 되어간다. 개인적으로 만난 횟수가 서너 번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까마득히 잊어버릴 만한 존재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술인 중에서도 윗자리를 점한 뻑 교수는 툭 소식이 끊어져 버릴 즈음이면 초대장만큼은 턱 하고 보내왔으니―보내오니 말이다. 나는, 내 주소와 이름을 정확히 달고 날아온 초대에는 가급적 응하는 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사회에 대한 동물로서의 예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초대장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 며칠 전부터 요리조리 시간을 발라두었다가 그날 정중히 사용한다. 시간을 비축한다는 게 큰 범주에서 볼 때 틀린 말 같지만 이런 식의 융통성은 불가능이랄 것도 없다. 그러나 피치 못할 경우란 언제라도 발생하기 마련. 따라서 뻑 교수의 초대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뻑 하고 돌출되기는 매한가지. 이번에도 여차지차 달포가 지난 며칠 전에야 그 불참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 내가 점심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뭐 꼭 초대에 불참했던 이유만으로 밥을 사겠다는 건 아니고, 부채로 느껴질 수도 있는 무엇인가가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인사동이나 강남 어디쯤에서 ‘한두 시간’을 대접하려 했지만 뻑 교수의 응답은 좀 다른 것이었다. 모처럼의 기회이니 교외로 나가자는, 소풍의 기분도 곁들이자는 창의적인 발언이었다. 할애하려던 한두 시간이 두세 곱으로 불어나리라는 주먹구구가 스쳤으나 나도 어지간히 방안 공기에만 절어 있던 터라 그러자고 했다. 하여 뻑 교수의 차를 타고 한강변을 달렸다. 이 세상 어느 남자보다도 뻑 교수는 내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는다. 그 점이 뻑 교수의 강점이자 장점이다. 뻑 교수와 함께라면 천상천하 어디를 가더라도 내 안의 소녀가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두근거림과 황홀을 촉발시키지 않는 남자는 파라다이스를 열어주지 않지만, 그 대신 지옥으로 밀고 가거나 벼랑으로 안내하지도 않는다.
뻑 교수: 그새 별고 없었습니까? 더 멋있어지신 것 같습니다. 검지: 정말이에요? 좀더 차리고 나올 걸 그랬나 봐요. 뻑 교수: 검지 선생, 붕 시인 아세요? 검지: 성함은 알지만 면식은 없습니다. 간혹 잡지에서 시를 봤는데 제가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뻑 교수: 붕 시인의 작품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그 양반이 얼마나 멋진 분인데…. 검지: 작고하셨지요? 뻑 교수: 예, 작년에 떠났지요. 그분은 정말 멋진 시인이에요. 검지: 뻑 교수님께서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믿어지지 않아요. 뭐니뭐니해도 시인의 멋은 작품이거든요. 붕 시인은 상을 여러 번 탔고, 저도 언젠가 시상식 때 박수친 적 있어요. 그렇지만 기분이 붕 떠서 자신도 모르게 친 손뼉이었습니다. 뻑 교수님께서 그토록 멋있다고 풍치는 배경이 절친했다는 점 말고 또 뭐가 있나요? 뻑 교수: 풍이 아니라 진짜예요. 그분은 누구를 만나든 호텔 식당이 아니면 절대로 밥을 안 먹었어요.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도 못할 배짱이죠. 검지: 그럼 밥값은 누가 내는데요? 뻑 교수: 그야 물론 상대방이 내지요. 검지: 붕 시인은 호텔식이 아니면 밥을 못 먹을 정도로 부자였나요? 뻑 교수: 아니죠. 아니지요.
스르렁 슬슬 바퀴는 잘도 돌았지만 뻑 교수와 나의 대화는 자꾸 뻑뻑해졌다. 대화란 서로 잘 맞아 들어가야 보람과 재미가 붕 뜨는 법인데 이미 절반은 어긋나고 있었다. 뻑 교수가 나의 검약주의와 자연주의, 희한한 취미를 어찌 알았으랴. 길섶의 풀꽃도 명멸하는 물별-필자의 신조어, 햇빛을 반사하는 물결 위의 섬광도 더 이상 차창을 향기롭게 해주지 못했다. 두둥실 피어오른 뭉게구름마저 외로움을 머금고 떠돌기 시작했다. 당대는 물론이고 중국의 역대 문장가이자 유학자였던 한퇴지는 “글을 아는 사람은 글을 보고 사람을 알고, 글을 모르는 사람은 이름을 보고 글을 안다.” 하였으니 내 어찌 눈에 들지 않았던 붕 시인의 시와 뻑 교수의 ‘멋 이론’에 환호할 수 있었으리오.
뻑 교수: 몇 해 전에 내 제자 한 명이 시로 등단했어요. 그래서 인사시키려고 자리를 주선했는데, 형편이 어려운 제자라 붕 시인한테 양해를 구했습니다. 아무 호텔 부근에 고기가 아주 좋은 집이 있는데 그곳으로 정하면 어떨까요? 붕 시인의 대답인즉 거~ 몇천 원 차이가 난다고…. 한마디로 무지르는 거예요. 검지: 그래서 호텔에서 식사를 하셨나요? 뻑 교수: 별수 없었죠. 검지: 음식값이 상당히 나왔을 텐데…, 계산은 제자가 했나요? 뻑 교수: 삼십 몇만 원 냈어요. 제가 냈지요. 제자한테 어떻게 밥을 얻어먹어요! 붕 시인은 설령 자기가 먼저 만나자고 했어도 돈은 안 내요. 검지: 그렇다면 밥 산 사람에게 어떤 방법으로라도 베풀거나 갚겠지요. 뻑 교수: 뭘요. 그런 거 없어요. 무조건 그래요. 그냥 그러는 게 그분의 멋이에요. 검지: 그런 염치가 어디 있어요? 자기가 산다면 모를까 남의 돈으로 호텔식을 고집하다니! 비열한들이나 할 수 있는 짓이에요. 선비정신을 가진 문인이라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지갑이 아니라 해도 배려심이 있어야지요. 뻑 교수: 요즘 세상에 선비를 논하다니…. 검지 시인은 조선시대에서 걸어오셨습니까?
어쨌든 자동차 바퀴는 제 소임을 다하느라 막무가내 앞으로 앞으로 달렸다. 개인 사정 아랑곳없는 물별들은 여기 번쩍! 저기 번쩍! 일어서며 번쩍! 넘어지며 번쩍! 뻑뻑거리다 붕붕거리다 물 위를 뒹굴었다. 강직한 가로수와 맞은편 차량들도 뒤쪽으로 뒤쪽으로 쾌히 날아갔다. 뻑 교수와 나만이 뜻하지 않은 붕 시인의 ‘멋’을 주제로 소풍의 묘미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틀어놨던 조지 윈스턴의 「사계」조차 웬일인지 볼륨이 추레해졌다. 우리 시단에 그런 원로 시인이 추앙받고 있었다는 게 나로서는 영 납득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시인을 줄곧 외경과 찬사로 일관하는 ‘뻑 꾜수’가 더욱 괴이쩍었다. 뻑 교수가 아니라 뻥 교수가 아닐까 의아했다. 사람의 개성과 기호란 천차만별이라더니 내 원 참.
뻑 교수: 다시 말하지만 붕 시인은 멋진 분이에요. 검지: 뻑 교수님께서 아무리 그렇게 홍보하셔도 저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 멋의 콘텐츠가 호텔식이라고 증명하시니…. 게다가 자기가 지출을 하지도 않는다면서요. 남하고 밥 먹을 땐 호텔이 아니면 ‘절대로’ 안 갔다면서요. 허황된 행위가 어떻게 멋이 될 수 있을까요? 시간이 아까우면 안 만나면 될 일이고, 만나기로 한 바에야 글 쓰는 사람으로서 격은 높이되 몸은 낮추어야지요. 지금도 우리 주변엔 굶주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문인이 영혼을 빛내기 위해 끼니를 거를지언정 어찌 혓바닥 사치를 위해 타인의 전대를 축낸단 말입니까. 열어보나 마나 뻔해요. 그렇지만 오늘 집에 돌아가면 펴보지 않고 꽂아둔 붕 시인의 시전집을 읽겠습니다. 전집을 독파한 후 다시 헤아려보겠습니다. 결국 시인은 시로 말하는 법이니, 절창들이 아로새겨져 있다면 붕 시인의 멋과 뻑 교수님의 지지도 용인하겠습니다. 뻑 교수: 검지 선생은 왜 자꾸 붕 시인을 나쁘게 말씀하세요? 검지: 그건 나쁘게 말하는 게 아니라 바르게 말하는 거예요. 뻑 교수: 무섭네요. 검지: 제가 무서운 게 아니라 바르지 않은 게 무서운 것이지요.
붕 시인의 일생에도 우여곡절이 깊었을 터. 어떤 연유로 호텔 신조를 세웠는지 알 수 없지만 윤회설에 따라 다시 태어난다면 극락인생을 누리옵소서 축원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심상찮은 인생관 뒤쪽에는 험난한 세월이 옹이 박혀 있는 법. 뻑 교수는 그날 교외까지 차를 몰았으나 소박한 추녀에 머물러 달랑 냉면 한 그릇을 비우고 돌아왔을 뿐이다. 돌이켜보니 뻑 교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다. 내가 점심을 사기로 한 마당에 하필 ‘붕 시인의 멋’을 들고 나올 게 뭐람! 곁들이 음식을 더 시키자고 권유했는데도 한사코 사양하던 뻑 교수! 결코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분별없이 대꾸했던 내 불찰이 뒤늦게 미안스럽다. (붕 시인의 시전집은 곧바로 읽었음을 밝힌다. 하지만 역시 나에게는….)
2008.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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