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신철규
그때부터 우리는 모두 벽이 되었다.
너랑 얘기하면 벽이랑 대화하는 것 같아.
하루 종일 벽을 따라 걷는 독방의 수인을 생각하는 밤.
다족류들은 벽을 만나기 전까지 방향을 틀지 않는다.
저 수많은 발이 여는 원탁회의는 얼마나 소란스러운가.
당신은 벽에 대고 사랑해, 라고 말한다.
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벽은 심장이 없고 심장의 떨림을 전할 입이 없다.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미개하다는 뜻이야.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는 한 벽은 수직으로 존재합니다.
당신이 내 가슴에 붙여놓은 수많은 메모들이 혓바닥처럼 날
름거린다.
총탄, 십자가, 달력,
칼로 새긴 헤어진 연인의 이름.
낙서가 벽을 무너뜨린다.
죽은 자를 살려내라.
당신은 오늘도 방패 같은 얼굴을 하고 우리를 막아서고 있군
요.
파도는 물의 벽입니다.
물이 불을 태우고 불은 물속에 잠깁니다.
물속에 갇힌 자들에게 목구멍으로 벽이 들어옵니다.
지상의 모든 수평선은 이제 하늘과 땅 사이의 벽이 되었습니
다.
목소리를 삼킨 벽은 두꺼워집니다.
거미는 자신이 만든 점성의 독방에서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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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시와 표현』2015-2월호 <신작시 광장>에서
*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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