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운희

검지 정숙자 2014. 6. 3. 02: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운희

 

 

  세 끼의 밥상을 착하게 비웠습니다

 

  한 남자를 보내놓고 멀쩡하게 생선살을 발라냅니다

 

  순조롭게 화장실도 다녀오고 TV연속극도 보았습니다

 

  설핏 바람 한 점이 등을 훑고 지나갑니다

 

  창문은 따듯하고 내일은 연극이 약속돼 있는 날입니다

 

  입고 갈 옷 준비며 점심 메뉴까지 한층 더 가벼워집니다

 

  길 건너 목련꽃이 저리도 순하게 이쪽을 바라봅니다

 

  따듯한 어깨를 돌려놓고 차 한 잔을 마주합니다

 

  서로의 신발이 밤새 안부를 나눕니다

 

  바람이 빠르게 길을 열고 지웁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땅의 울음소릴 듣습니다

 

  고요는 엄숙해지고 불안은 낮아집니다

 

  눈을 감으면 당신이 구름처럽 친절하게 떠다닙니다

 

  몸의 중심에 익숙해지려 발가락에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잠시 공기가 흔들리더니 벽에 걸린 당신이 기울어집니다

 

 

   * 시집『안녕, 딜레마』에서/ 2014.5.9. <푸른사상사> 펴냄

   * 정운희/ 충북 충주 출생, 2010년『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