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어와 낙타』전해수/ 발췌
*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 14세는 50년째 망명 중이다. 티베트인들의 종교인 라마교의 교주이기도 한 그는 1959년에 인도로 망명해 자신의 나라가 아닌 '외부'에서 조국의 독립과 평화를 위해 평생 노력해 오고 있다. 티베트의 불행을 뭉뚱그려 붉은 승복으로 어깨에 두르고 사는 떠돌이 고행승. 그는 티베트 표 소금자루를 짊어진 마지막 야크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은 동포들의 영혼을 마음으로 일일이 거두는 최초의 사제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가 미디어 매체들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서 사람이며 짐승들이며 산이며 물이여 심지어는 공기마저도 모두 신비로 가득 차 있다고 여기고 있는 티베트의 현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지구는 멍 든 부위가 많고 치유해야 할 아픔도 많다. 77 P
* 시인에게 있어 모든 생명체는 과거의 몸에 대한 기억과 시간 속에 머무르면서 회상과 절망과 꿈을 반복적으로 오가는 운명적인 존재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생명체는 시간을 견뎌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 생명에게 부여된 시간은 현재의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과거로부터 지속된 생명 탄생 이전의 몫까지 연결된 몸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여, 정신을 아우르는 몸의 현상적 의미는 고귀하지만 부질없고 가시적이지만 비가시의 세계를 내재하고 있는 복잡한 실존이다. 128 P
* 밝음과 어둠은 이분법에 의한 극단으로 표현하자면 극명(克明)이 아니면 극암(克暗)에 속한다. 이 밝음과 어둠이라는 말에는 참으로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지만 그 경계는 사실은 없거나 모호하다. 밝음이라는 볼 수 있음을 긍정하고 어둠이라는 볼 수 없음을 부정하는 것은, 볼 수 있음의 세계를 긍정하고 볼 수 없음의 세계를 부정하려는 속성을 선천적으로 지닌, 밝음에의 의지를 보유한 빛을 향한 숭배자들의 보편적인 욕망이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인지 영역은 분명 상반된 것이면서 영속성을 지니는 상호 보완적이면서도 필연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밝음과 어둠은 공존할 때에야 비로소 그 존재가 빛나기 때문이다. 밝음과 어둠의 어느 한쪽이 소멸될 때,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밝음과 어둠을 동시에 잃어버리게 되는 카오스적 상황에 빠지게 된다. 절대적인 밝음과 절대적인 어둠은 의지를 지니고 있는 개체의 인위적이고 계획적인 의도가 개입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단지 밝음과 어둠 중 어느 한쪽을 바라보는, 바라보고자 하는 눈은 자신이 바라보는 쪽이 밝음이라면 어둠이, 어둠이라면 밝음이 스며들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그래야 비로소 자신이 지향하는 바가 완성될 것이라는 희망이 거기에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지녀의 시는 낮과 밝음보다는 밤과 어둠에 대해 노래하지만 밝음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141 P
어둠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촉수가 일어선다 낮은 포복으로 걷는 길, 여
긴 별조차 뜨지 않는다
동굴 속에 매달린 한 마리 박쥐로 느끼는 불안 혹은 여유, 당신에게 가는
길은 늘 그랬다
밤의 깊이에 투신하는 용기를 가르친 건 적신(赤身)의 기억이다 먼 자궁 속,
견딜 수 없는 밤의 발버둥이 눈물로 번지면
뜨거운 양수로 변하던 당신과의 오랜 밤처럼, 적막 속에는 어둠이 되는 순
간의 비명이 번져 있다
휘청, 허공을 짊어진 은백양나무 가지들이 어둠을 잡고 우뚝 일어선다
-김지녀 「밤길」전문 142 P
* 우리가, 아니 시인들이 시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저한 마음의 상처 없이 도무지 시는 쓸 수 없는 거라고, 안 쓰고는 견딜 수 없을 때 비로소 시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지금도 말하는 이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 자명하다. 스스로의 상처를 발산하기 위해 자위하듯 긁적거리는 것이 시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시는 궁극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존재한다. 나와 너와의 소통, 나와 세계와의 소통……. 시는 세계와 인간, 인간과 역사를 이해하고 서로 간 소통하기를 원한다. 하여 소통에 대한 시인의 시적 갈구는 필연이다. 324 P
* 한 편의 시가 유기적 구조를 띠며 적잖은 연을 진행시키는 데 무리가 없다는 것은 시를 다루는 시인이, 이미 시를 잘 빚어내는 장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간혹 천재적인 기지로 단번에 써 내려가는 시를 쓰는 시인이 존재하기도 하고, 불현득 깨달음의 시구를 던져 주어 깊은 감동을 일으키는 잠언적 시도 볼 수 있겠지만, 시적 영감에 충실하게 반응하되 깊은 사유를 끌어낼 수 있는 시인이라면 '좋은 시인'의 한 자리에 들어서고 있음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375 P
* 시는 영감의 소산일까, 명민한 시인의 손끝에서 기획, 제작되는 예술품일까. 요즘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시들을 읽으며 난상에 빠질 때 스스로 자문해 보는 우문이다. 아직도 시의 순정성을 믿는 이들은 시야말로 인간 심성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샘물이며 구원과 위로의 메시지라 여길지 모르지만, 우주 비행이 보다 쉽게 가능해진 초과학적 21세기에 시를 순진한 영감의 발로로 여기는 이들은 몇 안 되는 골동품의 전시처럼 드물 것이다. 그렇다. 언제부턴가 시는 '시인'이라는 '예술가'에 의해 구성되고 전시되며 얼마나 멋진 포장과 시설로 꾸며졌느냐에 따라 세인의 눈에 들고 상품의 서열에 오르게 되었다. 겉은 화려하며 자극적으로. 내용은 애매하고 흐릿하게 텅 빈 내부를 감추는 방식으로 보다 능숙하게 지능적으로, 그런 의미에서 요즘 젊은 시인들은 날렵하고 기교적이다, 명민하고 지능적이다,
그러나 유행(?)에 따르지 않으면서도 강을 거슬러 유영하는 연어의 습성을 지닌 시인은 여전히 있다. 시류의 변방에서 혹은 삶의 주변에서 고루한(?) 시법을 고집스럽게 묘파하는 시도 드물게는 있다. 381 P
** 평론집 『목어와 낙타』에서/ 2013.7.10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전해수/ 본명 전영주. 1968년 대구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 취득.
** 2005년 계간『문학 선』으로 문학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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