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행천
홍일표
뱀이 남긴 것은 밀애의 흔적입니다 어디에 가도 꽃의 언저리를 감도는
붉은 숨결입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시냇물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한 마
리 뱀으로 당신을 휘감습니다 가끔 반짝이는 웃음소리에 돌들이 물방울처
럼 튀어 오르고 나는 둥글게 부풀어 오른 만조의 바다가 됩니다
풀숲을 빠져나간 뱀이 허리띠로 감겨 있습니다 진달래 눈부신 해안선을
들고 봄의 옆구리로 향하던 사랑이었습니다 머리 흰 사내였던가요? 파도
를 타고 내달리던 미명의 노래였던가요? 동해를 묶은 길고 눈부신 바닷길
에서 풀려나오는 푸른 뱀의 무리를 봅니다 수만 마리 불멸의 젖은 영혼들
입니다
마침내 멀리 돌아온 길이 하늘로 향합니다 밤바다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산과 바다를 지나 슬픔의 곡절 다하는 허공에 닿습니다 온몸이 붉은 몸부
림으로 뜨겁습니다 공중으로 날아간 뱀들이 마른 나뭇가지를 타고 분홍빛
봄비로 내려옵니다 눈 밝은 사행천이 장음의 맑은 곡조로 흘러가는 연록
의 들판입니다
* 『창작과비평』2013 여름호/『현대시학』2013. 11월호- 재수록
* 홍일표/ 1992년《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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