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나무시화전/ 문정영

검지 정숙자 2013. 8. 17. 23:08

 

 

    나무시화전

 

     문정영

 

 

  조계사 경내 나무시화전을 한다.

 

  봄나무들이 햇빛으로 쓴 글자들은 촘촘하여 불안을 지우고 불안의

깥을 쓴 것 같다. 생의 증표를 만년필촉처럼 세웠던 이들도 뚜렷하

게 변모한 글씨체를 묻는다. 바람이 허공을 지워 어떤 인연에 초록 잉

크를 번지게 한다.

 

  그림자에도 빈 구석이 많다.

  나무들은 색으로 채우고 번뇌를 다스리기 전에 가지 사이를 드문드

문 열어두었다.

  헛것을 보는 눈이 실명되고 앞이 환해지는 것은 내가 드문드문 해졌

기 때문이다.

 

  봄나무는 달마의 체형이다.

  몸은 이미 하나가 되어 사지를 나눌 필요가 없다.

 

  초록을 안다 하여 나무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다.

  절간 쪽으로 고개 숙인 나뭇가지들 불안의 무게를 아는 것 같다.

 

  계절이 지나면 나무들은 붓을 들지 않고도 허공을 허공으로 그린다.

 

 

  * 『애지』2013-가을호

  *  문정영/ 1997년『월간문학』으로 등단-시집『낯선 금요일』,『잉크』등--계간『시산맥』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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