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식물성 오후/ 정용화

검지 정숙자 2013. 11. 16. 02:10

 

 

     식물성 오후

 

      정용화

 

 

  걷지 않는 발은 뿌리가 된다

 

  버스를 타려고 언덕을 내려갈 때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힘겹게 서 있는 노인을 만날 수 있다

  꽃도 다 시들어버린 목련나무 옆에서

  수직으로 내리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오래 걸어왔던 걸음이 제 그림자에 갇혀 있다

 

  분주함도 사라지고 야성적 본능이

  식물성으로 순해지는 시간

  미련이 없으면 저항도 없다

 

  조금씩 땅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그 노인

  물끄러미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저 무심함이 품고 있는 견고한 내력들

 

  나 한때 저 목련나무의 꽃으로 핀 적이 있다

 

  나무가 되어가는 노인과

  죽어야 비로소 걷는 나무가

  한 몸이 되어있는

 

 

  * 시집『나선형의 저녁』에서/ 2013.10.25  <도서출판 애지> 펴냄

  * 정용화/ 충북 충주 출생, 2001년『시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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