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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끝나지 않은 전쟁들

검지 정숙자 2013. 10. 3. 20:09

 

 

   <이슬람 문명 올바로 이해하기>

 

   같은 성서의 민족, 왜 원수가 되었나 

 

 

  아랍인과 유대 민족은 같은 성서의 백성이다. 함께 유일신을 믿고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하는 척박한 땅에서 제한된 생태계를 공유하며 유목과 목축을 주업으로 살아온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민족들이다. 구약에도 꾸란에도 두 민족은 아브라함을 공통조상으로 받들고 있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어 몸종인 하갈과 혼인하여 이스마일을 낳고 다시 본부인인 사라에게도 태기가 있어 자식을 낳으니 이가 이삭이다. 그후 이삭은 유대 민족의 조상으로 후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낳고, 이스마일은 아랍족의 조상으로 그 가문에서 무함마드(마호메트)가 탄생하였다. 이런 역사적 친근 관계를 가진 두 민족이 지금 싸우게 되는 역사는 전혀 다른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그 무대는 바로 유대 민족을 박해했던 기독교 유럽이었다.

 

  기원전 천년 경에 유대 민족은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가 기원전 7세기에 앗시리아에 빼앗겼다. 그러다 또다시 국가를 세우지만, 기원후 1세기에 유대왕국은 로마에 멸망하였다.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건국할 때까지 2천년간 유대 민족은 국가 없는 유랑생활을 해왔다. 처절한 유랑의 무대는 바로 유럽이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아닌 유럽에서 박해와 고문과 민족적인 차별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래, 적어도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유대인은 악마와 동일시되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유대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저주받은 민족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유대인의 위상은 크게 향상되어 악마의 지위에서 탈피했다. 그러나 유럽인의 반 유대감정은 너무나 뿌리 깊어서 16세기 종교개혁의 선봉자였던 마틴 루터조차도 그의 저서《악마론》의 서문에서 "악마를 제외하고 가장 흉측하고 광포한 우리의 적은 유대인이다"라고 서슴지 않고 단언할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20세기 초까지 유럽인들은 유대인을 악마와 동일시했다. 14세기 유럽에 페스트가 번져 2천만 명 이상이 죽었을 때 교황청에서 페스트는 하나님의 저주라면서 악마를 제거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페스트로 희생된 사람도 많지만, 유대인들 또한 악마라 해서 대거 학살당했다. 한때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유행했는데 이 사냥의 1차 희생자도 유대인이었다.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로 이어졌다. 이것은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에서 1880년경에 러시아 황제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어떤 청년이 던진 폭탄에 맞아 폭사한 일이 있었다. 그 암살범이 현장에서 잡혔는데, 정신병자였다. 그런데 러시아 황제가 정신병자가 던진 폭탄에 죽었다고 설명하면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 청년을 데려가 발가벗겨 고문하였다. 발가벗겨 보니 할례의식을 치렀던 청년이었다. 이를 빌미로 러시아 황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유대인들의 음모라 하여, 다음 해인 1881년 5월법을 비밀리에 제정해 러시아에 있는 수백만의 유대인들을 3등분했다. A, B,C로 해서, 1/3은 학살, 1/3은 강제추행, 1/3은 훈련시켜 러시아의 충실한 노예로 삼으려는 음모였다. 이것이 공표되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 체코 등의 동유럽으로 이주하였다.

 

  1894년 프랑스에 있는 독일 대사관에서 프랑스의 고급 군사기밀 유출사건이 일어났다. 일명 '드레퓌스 대위 사건'이다. 자체 조사 결과 프랑스 고위 정부 장교가 넘겨 주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아주 고급 문건이었다. 여기서 비밀 문서의 글씨가 드레퓌스 대위의 필체와 비슷해 드레퓌스 대위를 진범으로 몰아 구속했다.

 

  드레퓌스 대위의 신원을 조사해 보니 유대인의 피가 섞인 것이다. 악마의 피가 섞였으니 프랑스를 배반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여 당시 최고형인 무기형을 선고했다. 그때 프랑스의 유명한 문인이었던 에밀 졸라 같은 지성인들이 각종 언론에 아무리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사건을 꿰어 맞추는 것은 프랑스 지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여 반발하였고, 사회적인 문제가 되자 재수사에 들어갔다.

 

  재수사 끝에 에스테라지아라는 소령이 진범으로 잡혀서 사건은 일단락되고 드레퓌스 대위는 풀려났다. 그때 풀려난 드레퓌스 대위에 대한 명예는 1994년 드레퓌스 사건 백주년에 맞추어 프랑스 정부가 공식으로 복권을 인정하면서 회복되었다. 반 유대감정이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유대인들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 1897년에 스위스에서 전세계 유대인들이 모여 제1회 세계유대인대회를 창설하고 비밀 강령을 채택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창설하는데 온 유대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합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정서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세우기란 상상할 수 없는 모험이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유대인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오스만 터키 제국이 독일에 가담하여 영국을 위협한 것이다. 오스만 터키 제국은 영국의 생명줄인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영국은 1915년 아랍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당시 이집트에 파견되어 있던 총독 맥마흔이 아랍의 성지인 메카의 부족장, 후세인에게 비밀 협상을 제의하였다. 아랍이 영국을 도와주면 전쟁이 끝난 이후에 팔레스타인에 아랍 국가의 독립을 약속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때 오스만 터키 제국과 아랍은 같은 이슬람 국가로서 영국에 대항한 성전(지하드)을 선포한 상태라 종교적으로 도저히 영국을 돕기 힘든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독립 국가를 보장받는 것이 오스만 터키 제국의 식민지로 사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영국을 돕게 되었다. 이리하여 아라비아의 로렌스 대령이 민병대를 조직하여 오스만 터키 제국의 주둔군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남부 전선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영국은 중부 전선에서 독일을 궤멸시키기 위해 유대인도 끌어들였다. 유대인에게도 자기들을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 주겠다는 비밀 약속을 하였다. 이것이 1917년 발포오 선언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전쟁 중인 1916년에 영국과 프랑스는 시리아와 쿠웨이트를 연결해서 북쪽은 프랑스가, 남쪽은 영국이 갖는다는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을 맺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이 차지하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팔레스타인이라는 한 지역을 두고 아랍인에게는 아랍국의 독립을 유대 민족에게는 유대 민족 국가 창설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자기네들끼리의 영토분할과 같은 3중의 모순된 비밀조약이 맺어졌다. 이것이 오늘날 중동분쟁의 불씨를 지핀 근원적인 배경이다. 그들이 저질러 놓은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영토분할 구상으로 지금 두 민족이 이제 역사적으로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과 보복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당사자인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평화의 화신임을 가장하며 인류의 공존과 평화를 들먹이고 있는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저질러 놓은 모순된 독립 약속에 따라 아랍과 유대인은 서로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우기 위해 투쟁을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박해받는 거의 2,000년 동안 팔레스타인의 주인은 아랍인이었다. 아랍인이 그 땅의 주인으로 2,000년간 살아왔고, 95%의 아랍인과 5%위 유대인들이 함께 평화롭게 생존해왔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유럽의 수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대에 4만 명이었던 유대인은 1948년에는 64만 명으로 늘어났다. 중동 지역에서는 요단 강 서안과 오아시스가 있는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공동체 생활이 이루어지는데, 이 지역은 인구가 두 배만 늘어도 오아시스가 파괴된다. 여기에 유대인의 이주로 인구가 열 배 이상 늘어나자 살기가 어려워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근의 요르단, 레바논, 리비아 쪽으로 쫓겨났다. 그들이 바로 팔레스타인 난민이다.

 

  1948년 미국의 후원 하에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이집트가 쫓겨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대신하여 아랍민족의 대표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1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지만, 이집트의 완패로 끝났다. 이집트의 대통령에 선출된 낫세르가 1956년에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또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 또한 아랍권의 무참한 패배로 이어졌다. 1967년 수에즈 운하 분쟁을 계기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발발하는데, 이것이 '6일 전쟁'이라 불리는 3차 중동전쟁이다. 아랍권은 패배는 물론 기존 황금 지역까지 빼앗겼다.

 

  오늘날 중동 영토 분쟁의 불씨가 되는 시나이 반도, 지중해 쪽의 가자지구, 요르단과 경계인 요단 강 서안, 시리아의 베카 계곡이나 골란 고원을 이스라엘이 점령하였다. 이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수차례에 걸쳐 이스라엘의 점령지 즉각 철수을 위한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나, 그 결의안은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1974년 중동전쟁 때는 석유가 무기화되면서 제1차 석유위기를 촉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친미국-친이스라엘 국가로 분류되어 원유수금에 막대한 차질을 빚기도 했다.

 

  상황이 그러한데도 미국이나 서방 세계는 리비아, 이란, 이라크가 반미를 부르짖으면 곧잘 무역봉쇄를 취한다. 지금 이라크에는 비행 금지구역이 설정되어 있다. 유엔 결의안이 아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남의 영공에 설정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50여 년 동안 수차례에 걸친 유엔 결의안을 준수하지 않아도 아무 제재를 하지 않으면서, 아랍 민족의 조그만 실수에 대해서는 폭격, 무역봉쇄, 경제제재 등의 조치를 취한다. 그러니 아랍 쪽에서 미국이나 서방 측에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극단적 반발이 테러나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테러나 이슬람 원리주의가 이슬람 세계의 전부는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무력을 행사하는 극단적인 원리주의는 이슬람 세계에서 5% 미만이다. 절대다수의 이슬람 세계는 서방과의 공존과 협력을 통해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하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나 서방 세계 측은 이슬람 세계를 테러나 일삼고 원리주의나 시대착오적인 무모한 발상으로 지구촌 공동체를 위협하는 세력이라 간주하여 발할 수 없는 제재를 가한다.

 

  아랍 국가들이 정당 방어를 목적으로 설립한 무기공장이나 원자로도 선전포고 없이 폭격을 가한다. 막상 아랍 국가의 당사자들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응어리와 분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 우리가 그들의 응어리와 분노를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어루만져 주어야 친구가 될 수 있다. 서방의 시각으로 위험하고 테러나 일삼는 사람들이라는 정서를 갖고 있다면 아랍은 결코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시리아, 레바논, 튀니지, 예멘과 같은 아랍권 나라들의 일부 교과서에 6·25는 북침 전쟁으로 표현되어 있고, 북한은 아주 절제된 채제하에서 모든 국민들이 빈부의 격차 없이 균형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반면, 남한은 빈부의 격차에 의한 모순 덩어리 사회이며, 미국이 심어놓은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는 국가로 묘사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꼭 풀어야 할 문제이지 남이 대신 풀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국제사회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인가. 현재 유엔을 주축으로 한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합의는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를 아랍 측에 반환함과 동시에 그것의 일부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두 당사자 모두가 과거의 불행한 대립을 청산하고 현실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 공동운명체적인 틀을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호 실체 인정-외교관계 수립-상호 불가침 선언-점령지 반환과 그곳의 비무장-합의된 지역에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과 같은 절차를 밟아가야 할 것이다. 그 일환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980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관계 정상화를 함과 동시에 시나이 반도를 돌려 받았다.나아가 이러한 과정은 1993년 9월 13일 미국의 백악관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화해와 공존의 평화협정을 조언함으로써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상호 실체를 인정하고 점령지 일부인 요단 강 서안 지역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립에 합의하였던 것이다. 물론 팔레스타인의 완전 독립은 동 예루살렘의 관할권 문제,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 내의 유대인 정착촌 철거문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이스라엘 귀환 등과 같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모처럼 이룩한 평화의 기본 틀은 유지될 것이다. 이러한 평화 분위기는 앞으로 이스라엘과 인근 요르단 및 시리아와의 평화협정 체결로 더욱 공고히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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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희수, 이원삼 외 지음『이슬람』217쪽~224쪽 / 초판 1쇄 2001.9.2- 초판 9쇄 2001.10. 18 <청아출판사> 발행

 

   * 이슬람을 알리는 12인의 젊은 학자들

 

      이희수/ 국립이스탄불대학교-역사학박사

      이원삼/ 모로코 무함마드 5세 국립대학교-철학박사

      최진영/ 튀니지 국립대학교- 언어학 박사

      유왕종/ 산토 토마스 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규석/ 터키국립 앙카라대학교-언어학 박사

      이종화/ 모로코 무함마드 5세 국립대학교-문학박사

      황병하/ 한국외국어대학교-문학박사

      신양섭/ 국립이스탄불대학교-문학박사

      황의갑/ 모로코 무함마드 5세 국립대학교-문학박사

      제대식/ 인도네시아 국립자카르타대학교-언어교육학박사

      김중관/ 동국대학교-경영학박사

      장경오/ 모로코 무함마드 5세 국립대학교-문학박사